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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퍼플레이첼 Sep 13. 2024

둘째는 왜 첫째보다 빠를까

자매들 사이에서 눈치로 살아남은 짬바

모든 동생들이 그렇진 않지만 첫째에서 둘째, 셋째로 내려갈수록 더 눈치가 있고 뭔가 약삭빠른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특히 둘째가 올해 초등학생이 되면서 첫째가 밟아간 과정을 똑같이 적용시켜 볼 때 그런 느낌을 자주 받는다.


어느 부분에서는 첫째가 별 탈 없이 했던 것들이 둘째에게 전혀 통하지 않지만(예를 들면 책을 잘 읽는 첫째처럼 순순히 독서시키기가 안 통한다는 점), 또 어떤 면에서는 첫째에게 버거웠던 걸 둘째가 너무 별일 아닌 듯 넘어가버리곤 한다(예를 들면 피아노 교육 진도나 그림 실력이 훨씬 빠르게 성장하는 점).


기질의 차이일지도 모르나 8살 둘째는 사회로 나가기 전 가정에서부터 세 자매 사이에서 치열하게 살아남기 위해 눈칫밥과 본능적인 감각을 키울 수밖에 없었기에 이미 보통 수준 이상 단련된 상태로 시작점에 선다.




# 8살 인생 첫 받아쓰기 시험


초1인 둘째는 이번 2학기부터 학교에서 받아쓰기 시험을 보기 시작했다. 문제들을 보니 은근히 어렵게 보이는 부분도 있고 낱말 받침과 띄어쓰기, 느낌표와 마침표까지 모두 꼼꼼히 체크해야 한다. 받아쓰기 1회 차를 집에서 연습할 때는 곧잘 했는데 실제 학교 시험에서는 전혀 실수하지 않던 엉뚱한 문제 2개를 틀려서 80점을 받아왔다. 초등 입학 후 첫 시험인 만큼 긴장도 했을 테니 80점은 충분히 잘한 거라고 칭찬했다. 하지만 스스로 당연히 100점을 받을 줄 알았는지 결과에 내심 혼자 속상해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 받아쓰기 2회 차를 준비하려고 집에서 첫 연습을 하니 40점이 나왔다. 울먹울먹 하던 아이가 채점이 끝나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왜 나만 이렇게 못하는 거냐며, 100점 맞고 싶은데 40점이니까 자기만 못 하는 거라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이 황당한 광경을 보자 나는 또 갑자기 뾰족한 T 엄마 모드로 돌변해 '네가 연습을 하나도 안 하고 처음 점검하니 틀리는 게 당연하고, 잘하고 싶으면 그만큼 열심히 연습하면 되고, 집에서는 40점이든 몇 점이든 틀려도 괜찮은 연습인 것이며, 연습하며 부족한 부분을 기억하고 공부해서 실제 학교 시험을 잘 보면 된다'라고 으다다다다 따발총을 쏘듯 설명해 줬다.


그리고 틀린 부분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설명했다. 첫째는 워낙 감정이 예민하고 더 컨트롤이 안되기 때문에 틀린걸 오롯이 대놓고 틀렸다고 말하기가 솔직히 조심스럽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틀린 걸 말하기보다 좀 살살 달래 가며 가르치고 알려주는 요령이 필요하다.(그래서 손이 많이 가고 서로 감정소모가 많다.) 그렇지만 둘째는 그에 비해 받아들이는 반응이 좀 더 너그럽기 때문에 가르치는 입장에서 눈치가 덜 보인다.


틀린 부분을 짚어가며 열심히 맞춤법에 대해 설명해 주는 걸 가만히 듣던 둘째가 갑자기 눈을 반짝거리며 콧물을 한번 훌쩍하곤 "엄마 그러니까 이 얘기네" 하면서 내 펜을 휙 뺏어간다.




# 영특함과 잔머리 그 사이 어딘가에서

"<갔다>의 '갔'은 어디론가 가고 있는 내 걸음걸이 발모양처럼 생긴 <ㅆ> 받침이고

<같다>의 '같'은 타조같이 잘 뛰고 싶은 내 마음처럼 <ㅌ> 받침이라는 걸로 외우면 되겠다."


오호라. 꽤 좋은 연상법인데? 눈치가 빨라서 그런가 잔머리가 좋은 듯 약간 꼼수 같기도 하고. 이런 식의 암기가 교육적으로 옳은 건지는 잘 판단이 안 섰지만 이 두 단어의 맞춤법을 보고 순식간에 차이점을 비교해서 자신이 어떻게 기억할지를 그림으로 표현하고 엄마에게 한번 더 설명하는 모습에서 대단하다 싶었다. 어쭈 요 녀석 봐라 하는 속마음이 입 밖으로 불쑥 튀어나올 뻔했다.



그렇게 집에서 연습하며 40점->80점->90점->100점을 만들었다. 발전적인 모습이었지만 집에서 엄마와 연습하는 것과 학교 시험에서 책상에 앉아 혼자 답을 쓸 때는 또 다르기에 큰 기대를 안했다. 시험 보는 날 긴장하지 말고 공부한 걸 잘 기억하면서 써보라고 응원해 주고 학교에 보냈다. 그러면서 나도 반신반의했다. 덜렁거리면서 또 실수할 수 있겠다 싶지만 그래도 열심히 연습했으니 혹시 100점 맞을 수도 있지.


평소라면 학교 끝나고 바로 피아노 학원을 가는 아이가 느닷없이 배가 고프다고 집에 들르겠다고 했다. 목소리가 한껏 들떠 있었다. 그리고는 집에 오자마자 받아쓰기 시험지를 내밀었고 거기엔 예쁘게 100점이 쓰여있었다. 그게 뭐라고 아이와 둘이서 신나게 기뻐하고 좋아했다. 열심히 연습했더니 40점에서 완전 업그레이드해 100점까지 맞았다고 오버스럽게 특급 칭찬을 해주면서 쌍 엄지척을 날렸다.



# 둘째였던 엄마가 바라본 둘째 포지션


생각해 보니 나도 어렸을 때 집안의 둘째이자 막내로 살았다. 오빠와 6살 나이차가 있긴 했지만 누가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집안 분위기상, 눈치껏 '아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거구나, 이러면 혼나는구나, 이런 걸 부모님이 좋아하시는구나, 이럴 때 칭찬받는구나'라는 걸 자연스레 알게 됐다. 우리 집 둘째와 셋째도 그런 비슷한 눈치가 생겨서 아무래도 첫째와 다른 나름의 약삭빠름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부모가 되어보니 아무래도 첫째보다 둘째, 셋째를 좀 더 너그러운 맘으로 키우게 된다. 첫째 때는 신생아 시기부터 입과 손에 닿는 모든 장난감 다 소독하고 끓이고 닦아대며 예민하게 챙겼는데 막내는 물던 쪽쪽이가 떨어지면 입으로 후후 불고 털어서 다시 물렸다. 첫째 시절을 대입해 본다면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충격적인 일이다. 둘째 이상 엄마의 '그럴 수도 있지'하는 널럴한 마인드가 아이에게 자유로운 혹은 약간의 방치하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그 안에서 아이가 알아서 해내게 되는 반강제적인 자립심을 키워주는 격이다.




이 각박하고 치열한 세상 속에서 자신은 첫째보다 빨라야 그나마 좀 더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짐을 본능적으로 일찍 깨닫게 된 둘째를 보면 엄마는 기특하면서도 안쓰럽다. 첫째에게 관심을 쏟느라 둘째, 셋째는 거의 얻어걸리다시피 따라오고 알아서 잘해주니 늘 육아가 버겁고 벅찬 내 입장에서는 고맙고 미안할 뿐이다. 


부디 둘째가 자신의 눈치 빠름만 믿고 요령 피우지 말고 우직한 힘을 길러 멋지게 홀로서기할 수 있길 바란다. 그러려면 매일매일 받아쓰기 연습을 성실히 해가는 엉덩이 힘부터 길러줘야지 싶다. 그리고 잔머리 같은 아이의 영특함을 당연하다 여기지 않고 아이의 능력과 노력을 인정하고 응원해 주는 든든한 엄마가 야겠다. 엄마도 이런 눈치 정도는 있어야 세 자매에게 사랑받는 엄마가 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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