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의 단호함과 1%의 허용
우리 집에는 티비가 없다. 대신 삼탠바이미라고 불리는 스마트 모니터를 작년엔가 들였다. 매일 아침 아이들 학교 가기 전 영어영상 30분 보기와 주말 공식 미디어 타임에 우리 부부 영화 보기 이렇게 딱 2가지 용도로 구입했다. 실제로도 유용하게 잘 사용 중이다.
신혼시절, 집에 티비가 있으면 서로 대화할 시간이 줄어들 것 같아 놓지 않기로 했었다. 그렇게 티비가 없는 상태로 첫째 아이가 태어났고 별일 없이 지냈다. 어느 날 지인 집에 가서 콩순이와 뽀로로를 처음 본 아이는 신문물을 만나 완전히 넋이 나갔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내 휴대폰을 갖고 와서는 뽀로로를 틀어달라고 울고 불고 난리가 났다. 그런 적이 처음이기도 했고 막무가내로 너무 보고 싶어 하길래 맘이 약해져서 딱 1개만 보자고 약속하곤 틀어줬다. 아이는 그대로 시선을 고정하고는 눈도 안 깜빡이고 정좌세로 앉아서 뽀로로를 봤다. 그 장면이 나에겐 너무 충격적이었다.
우리도 유튜브나 영화, 티비를 한번 보기 시작하면 선뜻 끄기 어렵고 그냥 계속 보고 싶어 지는데 어른보다 자제력이 약한 아이들은 오죽할까. 이렇게 어린아이는 영상물이 뇌 속에 거의 마약 수준으로 중독되겠구나 싶었다. 역시나 약속된 시간이 끝나고 뽀로로를 끄자 토할 듯이 울고 떼쓰기가 시작됐다. 난 그럴수록 더 단호해졌다.
티비나 영상물을 최대한 늦게 노출하겠다는 나의 결심은 확고했다. 더 커서는 내가 보지 말라고 해도 어떻게든 보게 되겠지만 아직 부모의 영향력 아래 있을 때는 내가 주도적으로 환경을 만들어줄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무기였다. 결국 아이의 관심과 흥미, 집중도가 책으로 쏠리게끔 집안 환경을 설정했다. 선물 받은 전집과 중고로 얻어온 책들을 아이가 자주 노는 거실에 예쁘게 전시했고 책 읽기 좋은 유아 소파나 책상도 놓아줬다.
아이는 늘 책 한 권 읽어주는 게 끝나기 무섭게 다른 책을 집어와서 "또! 또!"를 외쳤는데 난 아이가 읽어달라는 대로 목에 피가 나도록 최선을 다해 책을 읽어줬다. 이제와 돌이켜서 다시 하라고 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만큼 자신이 없을 정도다. 현재 체력으로는 도저히 상상하기 힘들지만 아마 지금 나이보다 10살 어렸던 젊은 시절이라 가능했던 것도 같다.
아이 입장에서는 영상물을 볼 수 없으니 당연히 책이 가장 재밌는 놀잇감이 됐다. 그림 그리기나 장난감 놀이를 빼면 집에선 책 말고는 딱히 할 게 없었다. 아이는 글씨도 스스로 읽을 줄 모르지만 그냥 책을 그림으로 보면서 눈에 담고 엄마 목소리로 들으면서 귀가 트이며 책을 그대로 흡수했던 시기 같다. 심심할 때마다 아기띠를 하고 유모차를 끌며 도서관과 서점에도 자주 갔다. 책 읽는 언니오빠들을 구경하고, 책은 안 읽고 장난처럼 책으로 탑을 쌓다가만 오더라도 일단 무조건 그냥 갔다. 아이랑 시간 보내기도 좋고 무료이기도 했고.
그렇지만 나라고 왜 그동안 인내심이 바닥나지 않았겠는가. 왜 티비를 안 사고 싶었겠나. 왜 유튜브를 안 보여주고 싶었겠냔 말이다. 그거 하나 틀어주면 아이는 쉴 새 없이 조잘거리던 입을 꾹 다물고 집안 전체가 순식간에 조용해질 텐데. 그런 마법 같은 일을 내가 해낼 수 있는데!!! 그래서 나도 늘 요란하고 수많은 내적갈등을 했다. 솔직히 티비나 유튜브 본다고 애가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지 않나.
'아오 진짜 그냥 오늘만 하나 틀어주고 나도 잠깐 숨 좀 쉴까?'
'맨날 그러는 거 아니고 진짜 이번 한 번만인데. 안되나.'
내가 아이에게 티비나 영상물을 틀어준다고 해서 누구 하나 뭐라 할 사람은 없다. 그냥 나 혼자 내가 지킨 원칙에 스스로를 혹사(?)시키며 버틴 거다. 물론 혼자서 케어하기 너무 힘든 날은 원칙을 어길 때도 있었지만 거의 99% 가까이 매일 이를 악물고 내가 세운 원칙을 지켰다. 그리고 그 처절한 노력 끝에 지금 10살이 된 첫째는 정말 다행히도 책을 좋아한다. 책을 좋아하는 게 아이의 타고난 기질일 수도 있지만, 책을 가까이할 수 있는 환경과 긍정적인 경험을 인위적으로라도 만들어준 노력의 효과가 꽤 크다고 믿는다.
물론 책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 여느 또래 아이들처럼 유튜브도 좋아하고 영상물도 좋아한다. 기회가 된다면 늘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해 순식간에 영상물에 흡입되듯 빨려 들어간다. 하지만 고맙게도 아이의 일상을 보면 늘 학교 다녀와서 배고프다고 간식을 달라고 하고선 자연스레 책을 집어 들고 소파에 앉는다. 건드리지 않으면 2시간이고 3시간이고 신나게 책을 본다. 나도 저렇게는 못 읽는데 싶을 만큼 책을 좋아하고 재밌게 즐긴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열심히 책을 빌려다 줄 맛이 난다.
아이가 한참 책에 빠졌을 때는 이름을 한참 불러도 모른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 다른 소리가 안 들릴 만큼 책 속에 집중해 있는 상태다. 그럴 때는 특별한 일이 없다면 그냥 둔다. 그 몰입감과 집중력을 흩트리고 싶지 않을 만큼 엄청 귀한 시간이란 걸 알기 때문에 굳이 건드리지 않는다. 그리고 아이가 책을 즐기는 모습을 보며 나도 흐뭇하게 그 순간을 즐긴다.
첫째를 외동으로 키울 때는 내가 세운 원칙이 잘 지켜졌다. 둘째와 셋째도 첫째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책을 본다. 언니 따라 동생들도 티비 없는 시간에 당황하지 않고 영상물에 집착함 없이 책을 보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나름의 놀이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첫째가 커가면서 영상을 절대 안 보여줄 수는 없게 됐고 영상물을 보는 언니와 함께 어쩔 수 없이 동생들의 첫 영상 노출 연령도 낮아지기 시작했다. 새로운 지침이 필요했다.
그래서 우리 집만의 규칙을 만들었다. 바로 주말 미디어 타임. 토요일과 일요일 일주일에 이틀간은 본인이 할 숙제나 공부를 다 마치고 저녁 6시쯤부터 자기 전까지 대략 3시간쯤 자유롭게 미디어를 허용한다. 아이들은 애니메이션 영화도 보고 유튜브도 찾아보고 게임도 한다.
그렇게 서로 허용된 약속을 하고 한계선을 그어둔 뒤 그 안에서 자제력을 가지도록 하는 방법인데 효과가 꽤 좋다. 평소에는 유튜브나 티비 시청을 할 수 없는 환경에 대해 세 아이 모두 자연스럽게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평일날에는 아예 기대를 안 한다. 아침 등교 전에 보는 영어 영상 30분이 아이들에게 소중한 이유다. 주말에 약속한 미디어 타임이 끝나면 자동 반납하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기 때문에 누가 더 보겠다고 떼쓰고 아이를 혼내는 일 없이 정리할 수 있어서 에너지 뺏길 일도 적다. 아이들이 미디어를 볼 동안 우리 부부도 안방에서 공식적인 영화 감상 시간을 갖게 돼서 편리하다.
지난 10년간 꽤나 고달팠지만 내가 세운 원칙들을 지켜왔기에 지금의 평온한 주말 미디어 타임이 가능했다. <99%의 단호함과 1%의 허용>이 티비 없이 아이 셋 육아를 하게 만들어준 원동력이자 가장 큰 비법이다. 아이를 위해 고영양 식단표를 짜서 열심히 요리했다거나 영어 유치원 같은 고급 사교육들을 보내주진 못했지만 책과 미디어에 대해 나름의 제한된 환경을 만들어줬다는 것에는 스스로 잘했다고 칭찬해주고 싶다. 특히 그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린 첫째가 순수하게 책을 좋아하고 즐기는 표정을 볼 때 10년의 고생이 보상받는 기분이 든다. 그래 네가 그렇게 좋다면 엄마는 그걸로 됐다. 그거면 충분하다.
이 세상의 모든 엄마가 꼭 괴로워하면서 티비를 없애고 아이에게 억지로 책을 들이밀 필요는 없다. 모두 나처럼 해야만 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엄마도 아이도 다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마가 세운 나름의 교육 원칙이 있고 자신만의 육아관이 있다면 일관되게 유지해나가길 추천한다. 누가 이렇다더라, 저게 좋다더라는 말에 쉽게 휘둘리지 말고 전문가 의견을 참고하되 한걸음씩 내딛길 바란다. 결국 육아의 목표와 그에 따른 우선순위를 바탕으로 환경을 만들고 아이를 이끄는 것은 주양육자의 몫이다. 지금 당장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뚝심있게 하루하루 쌓아가길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