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거 환경 경험의 차이가 주는 충격
이사 온 다음 날 아침. 작은 소파가 덩그러니 놓여있는 넓은 거실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보는데 순간 마음이 뭉클했다. 비록 우리 집은 아니고 전세지만 그래도 우리 가족이 이렇게 쾌적한 공간에서 지낼 수 있다니 감개무량했다. 꼭대기 언덕집, 신축 빌라 곰팡이집, 거실에 세탁기를 놓고 살던 신혼집 빌라, 섣불리 가계약 걸었다가 일부 날려먹은 일, 멍청하게 불법건축물 빌라 매수할 뻔 일들까지 그동안 거쳐온 집들과 부동산으로 생고생한 스토리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사실 마지막 신축빌라에 생긴 곰팡이 덕분에(?) 얼떨결에 서울 넘어 김포까지 와서 아파트 전세살이를 시작해 볼 수 있었다. 그때는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났나 억장이 무너졌지만 이참에 집을 보는 프레임을 바꿔서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보금자리를 꾸몄다. 그 곰팡이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직도 작은 빌라 안에서 원래 다들 이렇게 사는 거라며 그저 현실에 맞춰 아등바등 살고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 처음으로 그 곰팡이에게 고마웠다.
방 3개에 화장실 2개가 있는 전형적인 국민평형인 34평 아파트였다. 사진에서도 느껴지듯 작은방 하나 사이즈가 이사오기 전 빌라의 거실보다도 훨씬 넓었다. 빌라에서 조각조각 꾸역꾸역 넣었던 아이들 책장과 수납장들을 작은방 한쪽벽에 나란히 세우고도 넓은 공간이 넉넉하게 남았다.
층고도 타 아파트에 비해 높은 편이라 개방감이 있었고 저층이었지만 1층 필로티 자체가 높아서 우리 집은 거의 중층 가까운 뷰가 나왔다. 너무 낮지도 너무 높지도 않은 높이에 단지 내 조경 나무들이 푸르고 시원하게 보여서 마음이 좋았다. 채광도 훌륭했고 반대쪽 주방 창을 열어두면 거실 창과 맞바람이 쳐서 자동 환기가 됐다. 그래서 6년 된 아파트였어도 곰팡이 하나 없이 깨끗했나 보다.
누구보다 아이들이 이 주거 공간의 변화와 힘을 가장 빨리 강하게 느꼈다. 첫째는 햇살이 들어오는 작은 방에 푹신한 이불을 깔고 누워 일광욕을 하겠다고 했다. 여름이면 안방 베란다 쪽에 작은 미니 풀장 튜브에 물을 받아 워터파크처럼 즐겼다. 거기서 소꿉놀이도 하고 과자도 가져가서 아이들은 피크닉 분위기를 내며 간식을 먹었다.
억지로 짜 맞춘 빌라 평형 구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드디어 사람 살만한 집에 왔다고 느꼈다. 오히려 우리에게 너무 과분하게 느껴질 정도로 넉넉한 공간에 붙박이장과 팬트리장까지 갖춰져 있었다. 정말 내가 이런 곳에 살아도 되는 건가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가장 좋았던 점은 단지 내에 지상으로 차가 다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사오던 해 아이들 나이가 2살, 4살이었는데 본격적으로 활동량이 많아지는 시기에 이 점이 엄청나게 큰 메리트임을 직감했다.
우리 동 바로 앞에 있던 놀이터에서 매일 땀 흘리며 뛰어놀았고 차를 타고 멀리 공원 나들이를 갈 것도 없이 단지 내 산책만으로도 충분했다. 셋째가 태어나 유모차를 끌고 나가면 첫째와 둘째가 노는 놀이터 주변을 운동 삼아 걸으며 아이들도 보고 나름의 내 체력도 관리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매일 단풍잎을 줍거나 곤충을 찾고 흙놀이를 하며 미끄럼틀, 그네도 신나게 탔다. 친구들과 술래잡기, 엄마아빠놀이, 선생님놀이 등등을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킥보드로 신나게 달리고 공놀이, 비눗방울 놀이도 원 없이 했다.
빌라 골목이라면 수시로 오가는 차들과 좁은 공간들 때문에 이런 생활은 불가능했을 일들이다. 어딜 가든 주차 전쟁과 복잡함에 신경 쓰였을 텐데 여기는 그저 아파트 입주민인 것 자체에 이 모든 서비스가 포함되는 거였다.
특히 아이들이 넓은 공간에서 마음껏 자연을 느끼며 자랄 수 있어서 매우 만족스러웠다. 첫째와 둘째는 아직도 이 시절을 종종 떠올리며 다시 가고 싶을 만큼 재밌었다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신도시에는 아무래도 아이들을 키우는 젊은 부부들이 많기 때문에 교육적인 환경도 잘 조성돼 있었다. 특히 김포는 3자녀, 4자녀 가정도 심심찮게 볼 수 있을 정도로 아이들 천국이다 보니 당연히 아이들과 관련된 요소들이 발달할 수밖에 없다.
첫째가 늘 하고 싶어 하던 퍼포먼스 미술이나 발레, 키즈카페 체험 등등 모두 근거리 안에서 도보로 충분히 해결 가능했다. 문화센터나 학원, 공부방 등 여러 선택지들 중에 고를 수 있었고 단지 내 커뮤니티에서 제공하는 수업들도 저렴한 가격에 가깝게 이용할 수 있어서 편리했다.
아이들이 많은 지역이라 대부분 어린이집, 유치원 대기가 엄청났지만 운 좋게 새로 개원하는 유치원 정보를 알게 돼 바로 전화를 걸어 입학 대기를 걸고 들어갈 수 있었다. 놀이터에서 놀며 친해진 아이들과 서로 집도 오고 가며 친하게 지냈고 엄마들과 여러 정보들도 교류하며 재밌게 아이들을 키웠다.
이 아파트에서 전세로 대략 3년이 좀 안되게 살았는데 그 기간 동안 나는 주거환경에 따라 삶의 질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몸소 경험했다. 신도시 아파트에 사는 건 특히나 아이를 키우는 모든 방면에서의 퀄리티가 수직상승한다는 걸 오롯이 체험한 셈이다. 나 같은 경우도 아파트에서 아이를 키워보며 왜 다들 아파트 대단지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지 뒤늦게 깨달은 케이스다.
부동산을 얘기할 때 소위 '몸테크'를 할 것인가 '삶의 질'을 선택할 것인가 고민하는 이들이 많다. 개인적으로는 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몸테크를 선택하기 정말 어렵다고 느낀다. 특히 이미 신도시 아파트에서 높아진 삶의 질을 경험해 본 나 같은 경우라면 더더욱 쉽지 않다.
그래서 다들 처음부터 너무 좋은 집에 살지 말라고 했던가 싶다. 이제 지하주차장과 연결되지 않은 아파트를 상상하기 어렵고 단지 내에 차가 다니는 모습을 보면 매우 위험하게 느껴진다. 솔직히 엄청나게 좋은 고급 아파트에 살아본 것도 아니었고 그전엔 빌라에서도 멀쩡하게 잘만 살던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달라지다니. 사람이란 참 간사하다.
어쨌든 한번 끌어올린 삶의 질을 다시 끌어내리기는 결코 쉽지 않다. 더군다나 우리처럼 아이 셋이 있는 5인 가족에게 '삶의 질'이라는 부분은 쉬이 타협하고 포기하기 어렵다.
지금 누리는 삶의 질을 그대로 유지하거나 혹은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서 이를 만회할 수 있는 노력과 집을 보는 프레임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때부터 나의 집 공부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