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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여금 Feb 17. 2024

평범,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요

그냥 스페셜할게요

네 식구 오순도순 앉아 도란도란 밥을 먹고, 오늘하루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하하 호호 웃을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일상은 나에게 주어진적이 없었다.




기억 안 날 유아기 시절 한두 번쯤은 있었겠지마는 기억 속의 어린 나는 대부분은 울고 있던지, 떨고 있던지, 가만있던지, 셋 중 하나였다.


부모님과 오빠, 그리고 내가 같은 공간과 같은 시간에 있었을 때의 기억은 대부분_ 캄캄한 밤이었고, 아버지는 술에 취해 어머니를 때리고 있었으며, 어머니는 소리를 지르거나 울고 있었다. 오빠는 그런 부모님을 말리다가 안되면 울고 있는 나와 함께 도망 나와 근처에 사시는 고모를 불러오곤 했었다.


가끔씩 어머니가 술에 취해 늦게 들어올 때도 있었는데 그런 날은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이불을 뒤집어쓴 채 꼼짝도 못 하고 자는 척 숨죽여야만 했다.

그 시절 소음 하나 없던 고요한 밤, 또각또각또각 걸어오는 어머니의 구두 소리는 마치 곧 터질 것 같은 시한폭탄의 초침소리처럼 느껴졌다.


내 기억 속에 정말 딱 한번. 네 식구가 함께 웃고 있던 장면이 남아있긴 하다. 일곱, 여덟 살 무렵이었을까, 아현동 작은 단칸방에서 아빠, 오빠, 내가 동전을 조금씩 나눠 갖고 홀짝 게임을 하고 있었고, 엄마는 그런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게임을 계속 지고 있던 내게는 마지막 단돈 백 원이 남아 있었는데 아빠와 오빠는 당연히 내 손에 백 원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둘 다 “홀!”을 외쳤다.


그러나 나는 부엌으로 통하는 문지방 너머에 몰래 백 원을 숨겨두곤 빈 손을 내밀었던 거다. 그런 내가 어이없고 귀엽기라도 했던 걸까 모두 함께 빵 터져서 한참을 웃었더랬다. 그것이 유일한 [가족]과의 [즐거웠던] 기억이다.


그러나 그 기억이 썩  좋지만도 않았던 건, 그 어린 나이에도 ‘내가 조금 더 활발하고 밝은 아이였으면 어땠을까? 그럼 부모님이 나를 보고서라도 좀 더 웃어주지 않았을까? 그랬더라면 부모님이 안 싸우는 화목한 집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죄책감이 몰려오곤 했었다.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낳아버린 아이가 말수도 없고 아이답지 못했으니 나는 세상 쓸모없는 존재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내 나이 서른다섯, 늦다면 늦은 결혼을 했지만 비교적 순탄하게 4-5개월 만에 임신을 한 후 서른일곱이 되던 해 1월 아이를 낳았다. 나도 드디어 남들과 같은 평범한 삶을 살아볼 수 있게 된 건가. 싶었더랬다.


아이를 낳고 얼마 후, 연식은 오래됐지만 오롯이 우리 힘으로 경기도에 작은 아파트 한 채를 장만했고 이제 우리도 정말 평범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볼 수 있게 된 건가. 싶었더랬다.


나의 남편은 감정의 기복이 지랄 맞게 파도치는 나와는 달리 이래도 허허 저래도 허허 하는 곰돌이 같은 사람이다. 나의 기복마저 무력화시켜 버린.

타인이 개입하지 않는 한 부부 사이에 싸울만한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뭐라 한들 물먹은 스펀지처럼 모든 것을 흡수해 버리는 사람이기에 파이팅의 의지가 일지 않는다.

취향도 다르고 크게 즐거울 일도 없긴 하나, 그냥 그런 사람이니까 하고 내려놓고 인정하니 10년 차인 지금은 불만이랄 것도 딱히 없어졌다. 잔잔한 호수처럼 평온하다.


결혼 전 소위 말하는 나쁜 남자들을(엄마와 아빠처럼 나를 대하는) 만나왔던 나는 무엇에 씐 건지 가진 건 없지만 성실하고 착한, 가정적인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엄마와 같은 엄마가 되면 어쩌나, 아빠와 같은 남편과 살게 되면 어쩌나 하던 걱정과 불안들은 모두 불필요한 기우였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들과는 달랐다. 다행이었다.


육아에 힘은 들었어도, 놀랍도록 평범한 일상이었다.

불안하게도.




준이가 9개월 무렵이 되면서부터 나의 [불안]이 유형적인 형태를 갖추며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뒤집기나 기기, 걸음마가 늦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느려도 자기만의 속도로 찬찬히 하나하나 기특하게 해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돌아가는 모빌을 보며 쉴 새 없이 팔다리를 흔들고, 촉감놀이를 위해 쥐어준 밀가루 반죽은 마치 벌레를 보듯 피해 다니며 만지려 하지도 않았고, 여느 아이들과는 달리 눈을 마주치며 하는 상호작용도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1년 6개월 무렵엔 걸음마를 시작했는데 자동차의 바퀴, 자전거 바퀴, 러닝 하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팔을 펭귄처럼 파닥파닥 흔들어 대느라 산책하며 한걸음을 나아가기 조차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집 근처 도서관에 머리를 식히러 갔다가 우연히 집어든 책이 발달장애 엄마들의 수기집이었다. 엄마로서의 촉이 왔던 걸까, 책을 읽으며 눈물을 펑펑 쏟고 돌아오던 길. 나는 직감했다.


평범한 삶을 살 수는 없겠구나


산너머 산이고 인생의 굴곡은 끝이 없었다. 그다지 크고 유창한 꿈도 없었는데,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보는 거 하나였는데, 신은 그조차 나에게 허락하지 않았다.(물론 이제는 안다. 가장 힘든 일이란 것을.)


준이 네 살 무렵 세브란스 대학병원에서 [자폐스펙트럼장애 2급] 진단을 받았고, 곧바로 장애 등록을 했다. 누군가는 진단받는 날 눈물도 흘린다고 하고, 망설이며 미루다가 장애 등록을 하는 날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절망감을 느낀다고도 하던데. 나는 이미 울만큼 울며 모든 걸 받아들이고 난 후여서였는지 생각보다 큰 감흥은 없었던 것 같다. 아이의 증상이 너무도 명확해 의심하고 미룰만한 무언가도 사실 없었다.

평소엔 우유부단하고 정 많아 보이면서도 어떤 면에 있어서는 놀랍도록 냉철해지던 나였다.


그러나 아이의 장애를 알게 된 후 약 7,8년간 우울증과 무기력함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평생을 친구처럼 함께했던 우울증이었지만, 돌쟁이 수준의 말한마디 하지 못하는 아이의 대소변을 7년 넘게 받아내며 보육기관이나(코로나로 7세가 되어서야 특수학교에 제대로 등원시킬 수 있었다) 바쁜 남편의 도움도 없이, 홀로 키워 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엄마이지만 엄마가 되지 못한 우울함과 미래에 대한 막연함과 불안이 온통 나를 뒤흔들었다.

그래서 죽음에 필요한 재료들을 하나하나 사 모으던 때도 있었다.


한 번은 정신과의원을 찾은 적도 있는데, 나는 누군가에 대한 믿음을 갖기 힘든 성격인 건지.. 의사 앞에서 이야기를 하면서도 '저 사람도 직업인일 뿐인데, 하루종일 이런 사람들의 힘든 이야기를 듣고 있으려면 얼마나 피곤하고 힘들까..'라는 의문만 들며 울고 있는 내가 수치스럽고 부끄럽기까지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엄마의 이야기가 나왔는데, 의사분 요점은 나도 그냥 엄마 같은 사람이 되란다. 다른 사람보다 가장 먼저 자기를 생각하고, 남들 챙기지 말고 이기적으로 살라고.

'아.. 근데 어쩌죠, 저는 이미 이렇게 태어나 버린걸요..'

이제 겨우 엄마와 같은 엄마가 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엄마 같은 사람이 되란 말을 듣곤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했고, 받아온 약을 모두 먹은 후 두 번 다시 병원에 가지 못했다.




지금은 아이가 특수학교에 입학해 어느 정도 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됐고 그러면서 안정감을 조금은 찾은 듯하다. 아이가 학교에 간 시간 동안 잠을 충분히 자거나, 독서, 취미생활을 하기도 했고 심리학채널을 보며 나에 대해 공부했다. 그중 가장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은 운동과 외국어 공부였다.


그러면서 이렇게 나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루틴을 가진 일상이 얼마나 적성에 잘 맞는가를 평생 처음 알게 되었다. 2030대 시절의 나를 회상하자면, 온통 친구와 술이었다. 10대 때 그냥 흘려보낸 나의 사춘기는 느지막이 찾아와 꽤나 길고 고되게 지속되었다. 가뜩이나 낮았던 자존감은 술로 반복되며 잃어가는 기억과 체력을 동반해 하염없이 내리막 길을 걸었었다.


그러나 아이의 장애를 알게 된 후 침잠해 있던 오랜 시간 동안 꽤 많은 생각을 하고 나 자신을 다잡고 공부하며, 오히려 자존감이란 것이 생겨났고 주위사람들에게 휘둘리지 않을 만한 심지가 생겨났다.


그리고 아이를 키우는 순간순간이 큰 도전과 모험이기에 남편과의 평온함이나 여행이라는 일상의 도피라도 없었더라면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간 연락하지 못했던 몇몇 지인들과 다시 만났고 아이에 대해 처음 이야기 할 때면 깊이 안타까워해주곤 했었다. 그러나 이내 그녀들의 남편과의 불화들을 이야기하며 "그래도 넌 남편이랑 사이는 좋잖아", 라거나 "남편이 또 데려다줬어? 으휴.."라는 말을 연달아하며 시샘 어린 질투의 말을 던질 때도 있었다.


내가 남편에 대해 한 얘기라곤 "꼴 보긴 싫은데, 그냥 별 다툼은 없이, 평온해"라는 말 뿐이었고, 데려다준 것도 어쩌다 딱 한번(아이 간식 사느라 겸사겸사라는 변명을 곁들여서) 뿐이었는데 그녀들에겐 큰 이슈였던 건지, 만날 때마다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나도 너처럼 그런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고.. 왜 그게 그렇게 힘든 건데.."라는 말을 들었을 땐,


'읭?? 나에게 지금 [평범]을 논한다고?' 하하.. 그렇다 인간은 원래 자기 손끝의 상처가 가장 아프다. 타인의 지난하고 침잠했던 긴 시간이나 미래 따윈 중요치 않다. 우선 나부터도 그랬다.


그녀들과 달리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만 않았을 뿐.

'넌 건강하고 똑똑한 아이들이 있잖아, 남편은 말이라도 통하잖아, 미안해하기라도 하잖아.. 동물과도 같은 아이를 평생 책임져야 하는 것과 둘 중에 하날 택하라면 난봉꾼 같은 남편이 천만 배는 낫겠어. 너희가 아무렇지 않게 누리는 일상의 모든 것이 우리에겐 모험이야.. 외식하는 것, 대중교통과 마트를 이용하는 것조차 큰 용기가 필요하다고..’라는 말만 머릿속에 되뇌었다.


공감받고 싶은 그녀들의 마음이겠으나.. 나도 썩 여유롭지 못해서인지 그러한 말들이 비수로 꽂히고 탱탱볼처럼 튕겨나갈 뿐 계속 듣고 있는 것도 곤욕이었다.


본인들의 분노를 어떻게든 해소하고픈 마음인 건지 나의 남편에 대한 선 넘는 발언까지 서슴없이 하는 그녀들을 보며 뒷골이 땅겨왔다.


그들은 공감할 수 없을 이야기라 그간 겪었던 이야기들을 하지 않아서 혹시 내가 좋아 보이고 행복해 보이기라도 하는 건가? 싶은 맘으로 일부러 털어놓아 보아도 그녀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현재 [남편과 싸우지 않는 너]였다.


긴긴 시간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에 대해선 다 말할 수도 없지만 궁금해하지도 않는 것 같아 접어두기로 했다. 위에도 썼지만 [타인의 개입이 있지 않은 한] 싸울 일이 없다고 했지 타인의 개입이 없었다고 한 적은 없었고, 우울과 침잠의 긴 나날동안 어찌 멀쩡한 삶을 살았을 수 있겠는가.. 도 닦으며 살았던 나의 시절이여. 휴.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中


평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꿈꾼다.

훨씬 우여곡절 많았던 삶을 사셨을 누군가에겐 지금의 내 삶도 어쩌면 [평범]이라 칭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타인의 제각각의 많은 불행들은 간과한 채, 단편적으로 보이는 겉모습 만으로 판단하고 비교하며

애써 내 삶을 시궁창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 것은 아닌지. 타인의 슬픔까지야 깊이 이해할 필요는 없겠지만, 내 곁의 파랑새를 소중히 하는 법이라도 이제는 알아야 할 것 같다.



이번생만큼은
스페셜하게 살아 볼게요

평범, 그게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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