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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작가 Dec 04. 2019

낯선 이름

<내게 무해한 사람> / 최은영

"...언젠가 네가 한 말을 난 종종 떠올렸어. 영원히 천천히 굴러가는 공을 생각했어. 그 꾸준함을 상상했어. 이상하게도 눈을 감고 그 모습을 그려보면 쓸쓸해지더라. 데굴데굴 굴러가는 그 모습이 어쩐지 외로워 보여서. 그래도 우린 중력과 마찰력이 있는 세상에 살고 있어서 다행이구나. 가다가도 멈출 수 있고, 멈췄다가도 다시 갈 수 있는 거지. 영원할 순 없겠지만. 이게 더 나은 것 같아. 이렇게 사는 게. 사람이란 신기하지. 서로를 쓰다듬을 수 있는 손과 키스할 수 있는 입술이 있는데도, 그 손으로 상대를 때리고 그 입술로 가슴을 무너뜨리는 말을 주고받아. 난 인간이라면 모든 걸 다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어른이 되지 않을 거야."

"피조물에게서 위안을 찾지 마십시오. 수사가 되었을 때 나의 담당 수사는 그렇게 말했다. ... 그런데도. 그런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밤. 나를 오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이용할지도 모를, 그리하여 나를 낙담하게 하고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은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고 나의 신에게 조용히 털어놓았던 밤이 있었다."

"그렇지만 마음이 아팠다. 삶이 자기가 원치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가버리고 말았을 때, 남은 것이라고는 자신에 대한 미움뿐일 때, 자기 마음을 위로조차 하지 못할 때의 속수무책을 나도 알고 있어서."

"...소설의 가장 마지막은 모래가 '나'를 만나기 위해 홍천까지 찾아왔던 어느 날, '나'의 무정하고 방어적인 태도 속에서 모래가 깊이 상처 받던 순간을 부조해두었다. 되새기고 싶은 아름다운 추억이 아니라, 관계에 소리 없는 파열음을 남긴 서늘한 기억을 응축시켜 보여주는 방식은 최은영의 소설이 관계 속에서 지향하는 윤리를 투명하게 지시한다. 의도와 무관하게 자신이 누군가를 배반하고 그에게 상처 주었던 순간을 끝내 잊지 않겠다는 의연함은 이번 소설집의 한가운데 놓여 있는 것이다. ... 사랑이란 무엇일까. 이 소설은 사랑은 다만 상대 앞에서 자신의 가장 약하고 수치스러운 감정을 노출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 그 곁에 침묵하며 함께 서 있는 것, 대신해 우는 것, 조금씩 속도를 늦춰 걷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듯하다.
...
소설의 바탕이 되는 주요한 생각 중 하나는 우리가 유일하지도 소중하지도 않으며 끊임없이 대체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은 부정적으로 치닫는 대신, 실망과 균열들을 끌어안은 채 계속되는
평범한 일상의 삶을 의연하게 걸어가도록 한다."

- 해설 중에서

"...내 의지와 무관한 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살아 있는 한 끝까지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이것이 내가 사람을, 그리고 나의 삶을 사랑하는 몇 안 되는 방식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이렇게 무작정 작가가 친근하게 느껴진 적도 없던 것 같다. 

젊은 작가들의 소설을 종종 읽었지만 

소위 아날로그적인 나라는 인간과는 다르다고 느껴지거나 

심한 경우 괴리감을 느낀 적이 많은데,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난 작가가 그려낸 소설 속 배경과 인물들은 

집중하지 않아도 쉽게 그려질 만큼 내게 선연한 것들이었다.


이 소설이 나에게 특별하게 다가온 또 다른 이유는, 

도무지 내가 바라는 해피앤딩이 나지 않는데도 가슴이 따뜻해져서다. 

아마도 그것은 작가 자신이 가진 마음의 온도가 아닐까 생각된다. 

마음결이 무척 가늘고 고울 것 같은 글, 아니 사람. 

사람이 보여서 그녀의 소설이 좋다. 


가끔 나는 서점에서 내 입장에서는 무명인 작가들을 두고 막연히 서 있다가

무심코 한 권을 들어 올려 새로운 작가, 그 사람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데

이번에는 성공한 것 같다. 그녀의 첫 편이 궁금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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