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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작가 Mar 19. 2021

부러운 그녀

<빛의 과거> / 은희경

…내가 잠시 속도를 늦춘 것은 양보심이 강해서가 아니라 남자들이 원한다는 현명함의 뜻을 헤아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여자의 지성은 남자를 보필할 때에만 인정받을 수 있고 여자가 남자를 능가할 만큼 눈치가 없으면 진정으로 똑똑한 게 아니라는 뜻 아닌가. 똑똑한 걸 드러내지 않고 그 똑똑함으로 남자에게 헌신하는 태도를 제멋대로 현명함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여전히 나는 무력하고 방어적인 회색 지대에 갇혀 있었다. 나 자신이 실망스럽고 그러다 보니 의욕이 없어 방치하게 되고, 결국 해야 할 것을 제대로 못 해 무력감에 빠지고, 무력감은 쫓김과 불안을 낳고 그래서 자신감을 잃은 끝에 제풀에 외로워지고, 그 외로움 위에 생존 의지인 자존심이 더해지니 남들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하고, 그러자 곧바로 소외감이 찾아오고, 그것이 또 부당하게 느껴지고, 이 모든 감정이 시간 낭비인 것 같아 회의와 비관에 빠지는 것, 그 궤도를 통과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른바 청춘의 방황만이 아니었다.

…다수에 끼지 않는 것이 열등함을 의미하는 단체 생활 분위기에서, 소수의 개인은 일방적인 평가와 그것의 부산물인 오해의 대상이었다.

...약점이 있는 사람은 세상을 감지하는 더듬이 하나를 더 가진다. 약점은 연약한 부분이라 당연히 상처 입기 쉽다. 상처 받는 부위가 예민해지고 거기에서 방어를 위한 촉수가 벋어 나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약점이 어떻게 취급당하는 가를 통해 세상을 읽는 영역이 있다. 약점이 세상을 정찰하기 위한 레이더가 되는 셈이다.

그들은 자주 위축되고 두려움과 자괴감에 빠지지만 그런 태도를 되도록 감춰야 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약점이 있다는 걸 공유하면 편해지긴 하지만 무시당하는 걸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약점을 숨기고 방어하고 또 상처 받았을 때 태연하게 보이는 법을 연구하면서 타인을 알아간다.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약점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나를 조종하고 휘두를 힘을 가진다. 우리는 장점의 도움으로 성취를 얻지만 약점의 만류로 인해 진정 원하던 것을 포기하거나 빼앗긴다. 어쩔 수 없이 약점은 삶의 결핍과 박탈을 관장한다.

...약자는 위로받기보다 차별이 없는 존중을 원한다. 결점이 있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특별한 배려를 받는 게 아니라, 다수와는 다른 조건을 가졌을 뿐 동등한 존재로서의 권리를 누리기를 원하는 것이다.

모범생들은 눈치를 본다. 문제를 낸 사람과 점수를 매기는 사람의 기준, 즉 자기를 어디에 맞춰야 할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정답을 맞히려는 것은 문제를 내고 점수를 매기는 권력에 따르는 일인 것이다. 그렇게 그저 권력에 순종했을 뿐이면서 스스로의 의지로 올바른 길을 선택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모범생의 착각이다. 그 착각 속에서 스스로를 점점 더 완강한 틀에 맞춰가는 것이다.

…그 시절 우리에게는 수많은 벽이 있었다. 그 벽에 드리워지는 빛과 그림자의 명암도 뚜렷했다. 하지만 각기 다른 바위에 부딪쳐 다른 지점에서 구부러지는 계곡물처럼 모두의 시간은 여울을 이루며 함께 흘러갔다.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때 우리 모두는 막연하나마 앞으로 다가올 시대는 지금과 다를 거라고 믿었다.

...나는 그 시간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난 것일까. 오로지 내게 주어진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 것과 성적을 올리는 것, 두 가지에만 의미를 두던 고등학교 시절 훈육의 틀과 그리고 내가 동의할 수 없었던 세상의 모범생이라는 모순된 자리. 거기에서 시스템의 눈치를 보며 적응한 척했던 것이 단지 임시방편이었을까. 혹시 그대로 내 삶의 태도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훈육과 세뇌에는 탈출구가 없다.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뀔 수도 없으며, 끝없이 반복되는 그 틀의 궤적에 부딪히고 상처 입고 위축되며 계속해서 눈치껏 나를 속이며 살아야 하는 걸까.


…그동안 자기 자리가 아닌 곳에 가지 않고 모르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왔던 오현수는 모르는 것이 거의 다라는 생각을 하나 더 보태게 되었다. 그녀에게는 그것이 다른 조건을 가진 삶에 대한 존중의 한 방식이었다.

…젊고 희로애락이 선명하고 새로 시작하는 일도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인생이 더 나았을까.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욕망이나 가능성의 크기에 따라 다른 계량 도구를 들고 있었을 뿐 살아오는 동안 지녔던 고독과 가난의 수치는 비슷할지도 모른다. 일생을 그것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해도 나에게만 유독 빛이 들지 않았다고 생각할 만큼 내 인생이 나빴던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제 세상이 뭔가 잘못됐다면 그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으려 했던 나의 수긍과 방관의 몫도 있다는 것을 알 나이가 되었다.

나를 지금의 인생으로 데려다 놓은 것은 꿈이 아니었다. 시간 속에 스몄던 지속되지 않는 사소한 인연들, 그리고 삶이라는 기나긴 책무를 수행하도록 길들여진 수긍이라는 재능이었다.




어느 시점부터 내 나이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듯

간혹 어떤 작가의 나이가, 

내가 처음 그 작가의 글을 읽었을 때에서 멈춰 있는 듯 착각할 때가 있다.


어쩌다 은희경 작가의 출생연도를 보고, 그래서 나는 얼마나 놀랐는지.

일 년쯤 전에 읽은 그녀의 에세이에서도 나는 그녀의 글이 여전히 젊다는 데 놀랐던 터였다. 


그만큼 깨어 산다는 것 아닐까, 글이 젊다는 것은.


20년 전 그녀의 글보다 성숙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여전히 세상을 읽고, 삶을 들여다보는 눈이 탁해지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리고 여전한 필력과 통찰력.

아, 그녀의 통찰력은 추측컨대 해가 거듭될수록 더해지는 것 같으니 

그것은 이전과 다르다. 깊어졌다.


그런 그녀의 글은 

가슴을 움켜쥐는 듯한 감정에 붙들렸다가, 한없이 이완되는 게 반복되는 일을 경험하게 한다.

새삼, 갈수록 그녀가 빛나 보인다. 


소설은 70년대와 현재를 오고 가는데, 

40년 사이 그다지 변한 게 없는 듯한 

시대상과 그 속에 담긴 통념, 관념 같은 것들이 보여 씁쓸했다.


그 시절이 조금 더 적나라할 뿐,

그리 크게 바뀌지 않은 것만 같아 나는 몇 번 속이 뒤틀렸다.


그래도

미약하게나마 전진했다는 것은

방향이 잡혔다는 얘기 이리라 믿고

우리는 모두 인내심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이 세대가 아니라 다음 세대에 그 빛이 발현되더라도.

그러므로 나도 작가와 같은 '어른'이 되어야 하리라는 생각. 

깨어 사는 어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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