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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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하고 벌써 5일이 지났다. 그래도 5주라는 넉넉한 기간을 정하고 온 게 마음에 확실히 여유를 준다.
시차 적응하느라 며칠은 특별한 계획 없이 보내고, 월요일이 시작됨과 동시에 뉴욕에서의 '일상'도 시작. 요컨대 우리만의 아침 루틴 같은 게 금세 만들어졌다. 3년간 아이와 여행을 하지 못했지만 아이도, 나도 지난 여행들 중 우리가 구축해 온 틀을 자연스럽게 꺼낸 것 같다. 긴 여행들을 해왔기에 가능한 일이리라.
예컨대 나는 한국에서처럼 아침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아이와 함께 아침을 차려 먹은 뒤 아이와 내가 각자 해야 할 일상의 몫들을 하며 천천히 오전을 보냈다. 일상 같은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뉴욕에서 꼭 이런 시간을 갖고 싶었다. 세 번째 오는 뉴욕이지만 지난 두 번의 여행 모두 찍고 떠나는 듯했기 때문에, 일상 같은 추억이 간절했다. 아마도 나에게는 세상 여기저기에 일상의 기억들을 만들어 두고 사는 게 가장 부유해진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모양이다.
모든 일이 그렇듯 우리 여행의 장점에 쉽게 닿은 것처럼, 난관 역시 금세 맞닥뜨렸다. 특히 둘이 아닌 누군가와 함께 여행할 때, 아이는 묘하게 고집스러워지거나 말 그대로 센척하는 아이가 되는데 바로 그 모습이 드러난 것. 물론 나는 이제, 그것이 무리 안에서 제 모습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아이만의 영역표시 방법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남자아이 특유의 거칠고 극단적인 방식을 다듬어주는 것 역시 엄마인 내 몫이기에, 즐거운 상태를 유지하고 싶은 여행 중에 느끼는 이 부담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고맙게도 함께하는 이들이 가족이라는 게 또 그 마음을 많이 상쇄시켜 주었다. 즉, 판단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덜했던 것. 아마 자주 마주치는 가족들이었다면 적정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수 있지만, 물리적인 거리가 확실해서인지 그런 마음을 덜 느꼈던 것도 같다. 더불어 내가 그 어느 때보다 어렵게 결정하고 온 여행이니만큼, 채울 것과 버릴 것을 잘 처리해 이 시간을 누리고 가자는 마음이 컸던 것도 한 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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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도 걷는 걸 좋아하지만 걷기 좋은 도시들에서 나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걷는다. 한 여름에 간 터라 며칠에 한 번 꼴로 닥치는 폭염도 소용없었던 것은, 내가 추위보다 더위에 더 강한 사람이라는 이유가 컸다. 그렇게 원했던 것들을 보고 먹고 걷는 시간들이 매일매일 채워지다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듯 느껴졌다. 하지만 모자람은 없다는 마음. 딱 하나 아쉬운 건 벌써부터 남은 시간이 턱없이 짧게 느껴진다는 것뿐이었다. 떠나올 땐 방학에 친구들과 놀지 못한다고 툴툴대던 아이마저, 나와 둘이 있을 때마다 5주는 너무 짧은 것 같다며 아쉬운 마음을 드러냈다.
우리 두 사람이 그렇게 느낄 수 있었던 데는 두 사촌 동생들과 고모님 덕분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특히 아이가 사랑을 받고 있어 행복하다는 걸 엄마인 나는 너무나도 분명하게 느꼈다. 이미 숱한 여행들을 거쳐오면서, 아이가 사람들에게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자랄 수 있는 이유가 여행 중 만난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받은 수많은 친절과 따뜻함 덕분이라는 생각을 해왔다. 그런데 심지어 가족이라면, 그 사랑이 아이에게 얼마나 더 깊고 짙게 다가왔을까.
아이뿐 아니라 내게도 뉴욕 가족들의 사랑은 특별했다. 사실 여행을 떠나오기 전에는 내가 남편의 고모 그리고 사촌동생들과 5주씩이나 긴 시간을 보낸다는 데 다들 신기해했고, 심지어 남편조차 내게 어쩌면 '남의 가족'과 그리 잘 지낼 수 있냐며 놀라워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건 내가 괜찮은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걸.
하루에도 몇 번씩 느낀 작은 배려들도 물론 고마웠지만, 사실 내가 받은 진짜 큰 위로가 하나 있었다. 반년쯤 전, 태어나 한 번도 가져본 적 없을 만큼 가까운 관계로 지내왔던 사람과 틀어지는 일을 겪고 나는 사실 꽤 오래 마음을 일으키지 못했다. 무엇보다 가장 나를 힘들게 했던 건 그 가까운 사람이 나의 면면을, 나의 마음을 부정한 말들이었다. 물론 나에게 단단한 자존감이 없어서 그리 오래 힘들어했던 걸 거다. 그래서 그 말들이 옳고 그른지를 보기보다 '가까운 사람'의 말이니 맞겠지라는 생각에 자꾸만 방점을 찍었고, '내가 틀렸나, 나는 잘못된 사람인가'라는 생각에 빠져 일상이 흔들릴 정도로 힘들었다.
그런데 이번에 뉴욕의 가족들에게 나는 그 마음을 치유받았다. 때로 '그 나이에 너무 순진하게 사는 거 아니냐'는 소리를 듣는 내 태도가, 사람들이 나를 만만하게 보지 않도록 센 아우라를 갖지 못한 내가 틀린 것이 아니라는 걸 드디어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요컨대 나는 내 진심으로 사는 것일 뿐, 가짜를 두른 마음들이 내 진심을 부정하려 든 것뿐이라는 것. 모두가 진짜를 갖고 있지 않을 뿐, 모두가 가짜인 건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그러니 나와 세상을 억지로 의심하며 살 필요가 없다는 확신을 얻은 게다. 무엇보다 나는 나를 긍정하고 살기로.
그리고 생각했다.
진짜 사랑은 이렇구나. 한 사람 속 진심을 이렇게 긍정해줄 수 있는 힘이 사랑이구나.
기어코 뉴욕에 오고 싶게 만든 게 이거였다면, 나는 앞으로 여행에 대해 내게 느껴지는 강한 이끌림을 믿고 가야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