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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작가 Sep 25. 2019

순순히 믿는 힘

<기사단장 죽이기> / 무라카미 하루키

“시간이 빼앗아가는 게 있는가 하면 시간이 가져다주는 것도 있어. 중요한 건 시간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일이야.”

“건방진 소리지만, 제법 쓸 만한 흙덩이라고 해도 좋을 겁니다. 적어도 어떤 종류의 능력을 타고났습니다. 물론 제한된 능력이지만, 그것도 능력임은 확실하지요. 그러니 살아 있는 동안은 열심히 살 겁니다. 스스로 어떤 일을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따분할 틈은 없어요. 제가 공포나 공허함을 느끼지 않을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보다 따분할 틈 없이 사는 겁니다.”

“...네가 메타포라니 도무지 믿을 수 없군.
...
저는 그저 현상과 표현의 관련성이 시키는 대로 움직일 따름입니다. 파도에 떠다니는 무능한 해파리 같은 존재라고요.
... 여기까지 제가 거쳐온 길은 ‘메타포 통로’입니다. 그 길은 사람마다 각기 달라요. 똑같은 통로는 하나도 없습니다. ...
이중 메타포는 깊은 어둠 속에 도사린, 말도 못 하게 고약하고 위험한 존재입니다.”

“...훌륭한 메타포는 모든 현상에 감춰진 가능성의 물줄기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훌륭한 시인이 하나의 광경 속에 또 다른 새로운 광경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유즈가 말했다. “나는 물론 내 인생을 살고 있지만, 그 안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은 나와 상관없는 데서 멋대로 결정되고 진행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싶어. 다시 말해 나는 언뜻 자유의지를 지니고 살아가는 것 같지만, 정말로 중요한 일은 무엇 하나 직접 선택하지 못하는지도 몰라. ... “이 세계에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는지 몰라.” 내가 말했다. “하지만 적어도 무언가를 믿을 수는 있어.”

...나에게는 믿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좁고 어두운 장소에 갇힌다 해도, 황량한 황야에 버려진다 해도,
어딘가에 나를 이끌어줄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순순히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600페이지짜리 두 권의 소설이 주는 긴장감과 궁금증이 이 정도 된다는 것은

그가 굉장한 소설가라는 걸 증명한다는 뻔한 소감으로 시작하고 싶다.

그만큼 다음 장이 궁금해서 몇 개 단어나 조사 같은 걸 눈알이 마구, 멋대로 뛰어넘어댔으니.

상실의 시대를 읽었던 게 스무 살이니
16년 전 기억이라 확실하다 할 순 없지만,
작가 특유의 담백한 어투는 그대로인 것 같은데
성장기였던 그 소설 속 주인공이 자라 이 책 속에 등장한 것처럼 느껴졌다.
몹시 지적이고 호감 가는 남성으로.

전체적으로 그만의 위트가 있고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인물들과 서술,

분명하게 그려지는 배경과 들리는 음악들이

독자로 하여금 그가 만들어 낸 세계에 쉽게 입장하게 만든다.

그 탁월함은 단정하고 스마트한 것이 줄 수 있는 지루함을 넘어

되려 읽는 게 수월하도록 돕는다.

안타깝지만 아직 그 연륜은 내가 감히 평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싶다.

결말을 맺는 과정 역시 간결하고 시원한데, 사실 그 내용이 시원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믿음’에 대한 화자의 말은 의외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그가 말한 어떤 힘에 대한 확신이 삶을 어영부영 살지 않게 한다는,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평안’할 수 있다는 데 공감했다.

엉뚱하면서 지적이고,
신비로우면서 사실적인.
그걸 다 가진 사람인 걸까, 이 작가는?

이야기나 독자인 내 기분 모두 어쨌든 해피앤딩.
찝찝하지 않아 좋다.
내가 느낀 작가의 모습 그대로.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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