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는 도시의 낭만

애착하는 것으로부터 로맨스

by 피여나



네 모든 낭만을 포기하지는 말아라, 앤.
조금은 낭만적인 게 좋아.

- '빨간 머리 앤' 중에-





나에게도 주근깨 있어서였을까?

‘빨간 머리 앤’ 캐릭터를 참 좋아했다. 지금도 물론.

낭만을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좌우명처럼 새기면서,

그렇게 매 순간 조금의 낭만을 간직하고 사는 삶이다.


어렸을 적부터 간직해 온 낭만이 있었다.

'도시'에 대한 낭만,

‘도시'에서 파생되는 '사람', '사랑', '성공', '돈', '문화',

‘놀이'에 대한 낭만.


처음은 도시 그 자체로 시작했다.


처음으로 혼자 서울에 가게 된 날, 설렘과 두려움이었던 마음을 아직 기억한다.

19살 수능을 끝마친 직 후, 손꼽아 기다리던 박효신 콘서트에 혼자 간 날이었다.

아주 용감했지!

하지만? 첫 도전에는 시련이 따르기 마련 아닌가.


콘서트에서 만난 친구와 콘서트를 마치고 나와 떡볶이를 먹다가 집으로 가는 마지막 차를 놓쳤다.

(그 이름 모를 친구는? 유유히 버스를 타고 떠났지...)

혼자 택시를 타고 청량리역에 갔다가, 다시 동서울터미널로 왔다가 난리도 아니었다.

청량리역 앞에는 노숙자분들과 알 수 없는 아주머니들이 서성거리고 있었고, 도망치듯 올라탄 택시 여기사님이 영화 '아저씨'에 나오는 개미굴 아주머니를 닮았을 건 또 뭐람...(진심...)

시골에서 온 것을 티 내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쓰면서,

'동-서-울-터-미-널-로-가-주-세-요'

겨우겨우 24시간 하는 카페를 찾아서 뜬 눈으로 밤을 보내고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설렘인지 공포인지 모를 두근거림을 간직한 채 시간이 흘렀고, 혼자 서울에서의 '한 달 살이'를 결심했다.

대학교 4학년 여름방학, 서울에 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추가 실습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하루에서 '한 달'이 되었으니 이번이야 말로 서울이다!

하지만? 내가 시골에서 왔다는 걸 망각하지 말라.


실습을 하던 '아이존'이라는 현장은 발달장애아동들이 오던 곳이었고, 이제 말을 하기 시작하는 애들한테 나의 경상도 사투리를 가르쳐줄 순 없지 않은가...

서울 선생님들의 말을 '음표' 그리 듯이 천천히 따라 하면서, ‘이건 내가 말을 배우는 건가' 싶은 심정이었다.

‘안 \ 녕 / ? 밥 \ 먹 / 었 / 니 / ?’

마치 이제 말을 떼기 시작한 아이가 되어 말도 배우고! 주말에는 하염없이 서울을 돌아다니며 세상을 배웠다.


아! 내가 서울에서 가장 놀랐던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버스'이다!

내가 있는 시골에서는 버스가 노란색, 파란색 밖에 없었는데, 어쩜 버스 색깔이 다양하고 번호도 많은지~

주말이면 가까운 버스를 올라타서 서울을 구경했고,

저녁이 되면 버스나 지하철을 내려서 큰 건물을 사이를 걸어 다녔다. 정말 그냥 걸어 다녔다.

반짝이는 건물들 사이에 속해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도시에 대한 낭만은 점차 번져간 것이다.

'사람'으로, '사랑'으로.

'성공'으로, '돈'으로.

'문화'로, '놀이'로.


나에게 도시는 내가 상상하는 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낭만적이고 꿈과 같은 공간이었으니까.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꿈을 이루는 성공으로 많은 돈을 벌고,

다양한 문화와 놀이를 즐기며 하루하루가 행복한,

그런 도시의 삶을 상상했다.


지금은!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데...!


막상 살아가고 있는 반짝이는 도시에서 가끔은,

아마 요즘은 조금 더 빈번하게!

수많은 사람에 치여서 지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상처받고,

꿈은 여전히 꿈으로 멀기만 하고,

상대적으로 자주 부족함을 느끼고,

문화와 놀이도 사치가 되어감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조금의 낭만은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아마도 나에게 ’도시‘란,

누군가에게는

낯선 곳에 여행으로 자신을 내던지는 일,

푸르른 바다가 보이는 곳에 가는 일,

조용한 시골 속에 자연과 함께 머무는 일,

책 속에, 영화 속에 주인공이 되어보는 일,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과 나누는 일일 것이다.


힘든 현실에서 조금은 벗어나서

저마다의 낭만 속을 거니는 일일 것이다.



나도, 우리도,

‘빨간 머리 앤’처럼 하루를 살아내면 어떨까?


힘든 일상 속에서도,

애착하는 어떤 것이 내 것이 되지 않아도,

어떤 것은 포기하고 타협하더라도,

조금의 낭만을 가지고 살아가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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