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자와 퇴사자가 만났다.
공교롭게도 우리는 같은 시기에 회사를 나왔다. 일주일에 최소 5일은 피로에 찌들어 살아가는 직장인 신분일 때 연애를 시작하면, 없는 체력과 시간을 쪼개가며 만남을 이어가야 했지만, 나란한 퇴사자인 우리에게는 주말에만 허락되던 일들이 평일 대낮의 안쪽까지도 잔뜩 미끄러져 있었다. 이제 사랑을 막 시작하는 커플에게 주어진 무한정 자유 시간이라니. 그렇게 우리는 평일이라는 값진 전리품을 등에 업고, 낮의 찬란과 밤의 여백을 독점한 채 거들먹거리는 건달들처럼 제한 없는 데이트를 즐기기 시작했다. 우리만의 천진난만한 시간은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골목마다 햇살이 흩뿌려진 한낮의 연남에서 만나 그동안 가보지 못했던 카페들을 호핑했다. 호핑이라 하면, 말 그대로 여러 카페를 깡충깡충 옮겨 다니는 것. 공부, 작업, 약속과 같은 목적성을 띠고 카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분위기만을 즐기기 위한 걸음은 우리에게 일상을 유영하는 감각을 길러주었다. 그곳에서 그간 한켠에 묵혀두었던 책을 하나씩 주워 들고 창 틈으로 비치는 햇살을 담요 삼아 온종일 각자의 독서를 즐겼다. 그러다가 잠이 솔솔 밀려오면,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짤막한 단잠을 청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반짝이는 윤슬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리버뷰 카페 통창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삶에 대한 수다를 도란도란 나눴고, 다음 날 아침 출근이 걱정되지 않는다는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채 북악산 팔각정으로 올라가 쌍화차를 한 잔씩 집어 들고 늦은 밤까지 재잘거리기도 했다. 붐비지 않는 동네 포차에서 마주 보고 앉아 새벽녘까지 거나하게 취해버린 적도 많았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일상에 녹아들어 단단한 하나가 되었다.
우리의 사랑이 깊어질수록 우리가 평일을 향유하는 방식도 과감해졌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시간을 아주 비효율적으로 낭비하는 일에 점점 더 강도를 높여가며 도전하는 것 같았다. 마라를 좋아하던 우리는 하이디라오를 무려 7시간 가까이 웨이팅하며 홍대 곳곳을 정처 없이 전전했다. 뮤지컬을 사랑하던 우리는 평일 낮 2시 타임을 노려 명당자리에서 유명 뮤지컬 배우들과 눈짓으로 교감했다. 모두가 점심을 해치우고 책상 앞에 둘러앉은 오후 2시에 우리는 단둘만의 오마카세를 즐겼고, 새로 지어질 강원도 아파트 모델 하우스 구경을 핑계로 차를 끌고 즉흥 속초 여행을 떠났다. 일본식 타코야키가 많이 당기는 날에는 충동적으로 비행기표를 끊어 예정에 없던 여행길에 오르기도 했고, 한 번쯤 가보고 싶었지만 회사를 다니던 시절엔 시간을 내기 어려워 늘 미뤄만 뒀던 무주 영화제에 차를 끌고 내려가 난생처음으로 덕유산 위를 수놓는 반딧불이를 만나기도 했다.
돈보단 시간이 몇 배로 값진 세상이라던데. 쉬이 누릴 수 없는 시간을 누려보니 비록 지갑은 가벼워질지언정,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도 여유로운 부자가 된 것만 같았다. 그리고 때마침 시작한 우리의 연애는 물끄러미 번져오는 낭만에 다채로운 빛깔을 덧칠했다.
회사를 벗어나 우리만의 길을 찾아 나선 우리는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해 줄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남들이 쉬이 가지 않는 길목에 서서 혼자서만 고요한 자유를 누리려 했다면, 아마도 조금은 외로웠겠지. 그렇게 우리가 만나 함께 경쾌히 꾸려나갔던 추억 다발은 새로운 갈림길 앞에서 끝내 다른 방향으로 꺾여버렸지만, 우리는 인생에서 어쩌면 가장 큰 자유를 맛보았던 우리만의 싱그러운 봄에 다함없이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