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잘딱깔센이 아니고, 알잘딱깔망입니다.

퇴사 후, 오전 카페 알바를 시작했다.

by 편린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는 건 오래도록 내게 굳은살처럼 박혀온 고질적 습관이다.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의 눈에 띄는 모범 학생이었고, 회사에서는 하나를 시키면 열을 해내 선배님들께 인정받는 핵심 인재였다. 늘 시키지도 않은 기획서와 분석 자료를 만들고, 창의적인 대안을 뽑아내며 언제나 한 발 앞서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늘 주목받는 사람으로 자라왔다. 그런 나였기에 작은 카페에서 사장님께 사랑받는 일쯤은 너무나도 자신 있었다. 퇴사 후 늘어진 일상을 지탱해 줄 오전 루틴을 만들고자 시작한 알바였지만, 나름 150:1을 뚫고 들어온 자리였기에 더 잘 해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내 굳건했던 믿음은 보기 좋게 무너져 내렸다.


대기업을 그만두고 나와 생전 처음 해보는 카페 파트타임 잡은 너무 즐거웠다. 헤르만 헤세가 그랬던 것처럼 나에게도 ‘단순노동’이 절실히 필요했으니. 머리 쓰는 일로만 지새웠던 몇 년의 밤이 너무나 버거웠단 말이다. 하루의 시작, 카페를 찾는 손님들에게 정성스러운 커피 한 잔을 건네는 일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행복한 일이었다. 피로에 절어 회사로 향하는 사람들에게 자그마한 희망이 되는 것만 같았달까. 전에 없던 새로운 유형의 행복이었기에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사장님이 손님들께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주문을 받고 나서 작업 동선은 어떻게 쓰시는지 유심히 관찰하고 분석했다. 매뉴얼도 따로 없었지만 레시피를 일일이 기록해 외우고, 시럽 용량부터 에스프레소 추출 시간, 우유 스티밍 온도까지 나만의 노트에 빼곡하게 채워갔다. '그래. 주도적이고 주인 의식 있는 인재. 이게 내가 제일 잘하는 영역이지.' 사장님이 안 계신 틈에도 거슬리는 집기류들을 정리하고, 내가 그분이었다면 했을 법한 행동들을 알아서 척척. 여유 있게 밥알을 삼킬 틈조차 없이 바삐 흘러가는 점심시간을 홀로 지나는 중에도 손님들과의 기분 좋은 스몰 토크를 한 마디도 놓치지 않았다. 그러고는 매번 순진한 눈빛으로 사장님께 질문을 통해 허락을 구하는 시늉을 했다.


알잘딱깔센.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이었다. 이번에도 분명 일 잘하고 싹싹한 알바생이 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의도와는 달리 사장님의 꾸중만 점차 늘어갔다. 유독 내게만 차갑고 말수가 없어진 사장님. 생전 처음 겪는 온도에 당황했다. 내 과한 열정이 오지랖이 되어버린 걸까. 사장님이 주로 어떤 포인트에서 날을 세우시는지 관찰한 거듭한 끝에 겨우 짐작한 이유는 내가 그분의 무대에서 과하게 나섰다는 것.


알잘딱깔망. 알아서 잘 딱 깔끔하게 망해버린.


내 리그에서 뛰던 방식이 다른 리그에서는 실격의 이유가 될 수 있었던 거다. 카페 안에서의 내 주도성은 누군가의 공간에 이미 오래도록 굳어진 질서를 침범하는 일이었나 보다. 그렇게 내 미소와 노력은 점점 공허한 메아리로 울렸다. 회사 모드 스위치가 켜진 내가 사장님의 눈에는 눈엣가시로 보였거나, 혹은 설치는 아이로 보였거나, 혹은... 본인의 가게를 마음대로 휘저으려는 사람 정도로 보였으려나.


끈기 하나만큼은 자신 있던 나.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면 원하던 결과를 얻을 때까지 중도 포기란 없던 나. 직무가 적성에 잘 맞지는 않았지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신중히 버텨왔던 4년여간의 회사 생활. 그런 내가 단 두 달 만에 스스로 물러나기로 결심했다. 지독히도 끈질긴 내게는 쉬이 찾아오지 않는 실망스런 결과물이었다. 그렇게 퇴사 후에 처음으로 맞이한 일터와의 인연은 슴슴하게 끝이 났다.


하지만 가끔은 이런 좌절이 나를 키운다. 새해부터 대차게 망쳐버린 도전 앞에서 얻은 교훈은 '모든 곳에서 통하는 만사형통의 방식이란 없다는 것.' 잘 보이려고 지나치게 전전긍긍하는 마음이 때로는 실격의 이유가 될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누군가의 무대 위에서 줄타기하기보다 내 무대에서 내 방식대로 움직일 때 진짜 빛나는 사람이라는 거다. 아마도 나는 배우가 아니라 감독이 되고 싶은 사람이었나 보다. 그래서 방송국에 다닐 시절엔 마음 한켠에 그토록 영화나 드라마 제작을 꿈꿨던 걸까.


그래서 이번에는... 실격 걱정 없는 나만의 리그를 만들어보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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