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엔 묵호로 출근합니다!

퇴사 후, 평일에는 종종 여행을 떠난다. - 묵호 혼행 일지

by 편린

“너는 퇴사하고 제일 하고 싶은 게 뭐야?”

“음... 난... 평일에 인적 드문 바다 앞에 앉아 와인 마시며 사색하는 거.”


퇴사를 앞두고 한껏 들떠있던 나, 그리고 당시 나와 함께 회사를 나온 동료가 나눴던 대화다. 우리만의 소박한 언약을 뒤로한 채 한참의 시간을 흘려보낸 지금, 문득 그때의 다짐이 떠올랐다. 그래. 돈보다 시간이 많은 백수의 특권은 바로 사람들이 모두 일하러 가 한적해진 평일의 곳곳을 전세 낸 듯 쓸 수 있다는 것이었지. 막상 자유가 주어지니 간절했던 여유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되어버려서 갈망했던 일들을 '언젠가는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미루기 일쑤였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언제 그런 호사를 누리겠는가. 이제는 마음의 건강, 신체적 건강을 모두 되찾았으니, 한쪽에 잔뜩 재뒀던 소망들을 하나씩 꺼내어 이행하고 싶어졌다.


그리하여... 어느 월요일 출근 시간부터 야심 차게 혼자만의 여행을 떠나보기로 결심했다!



요즘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핫하게 떠오르고 있는 국내 여행지가 하나 있다. 이름도 아기자기 귀여워 괜스레 포근한 마을의 정경이 그려지는 ‘묵호’. 동해에 깊은 인연을 끼고 살아오신 어머니께 심심치 않게 들어왔던 미지의 동네였다. 찬란했던 청춘 시절의 어느 여름 방학, 어머니께서 바닷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한눈에 반해버렸다던 그 어달항을 품은 곳.



기차를 타고 한참을 달려 도착한 묵호는 온갖 SNS에서 번지르르하게 포장된 채 광고되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느림의 미학이 있는 곳. 조용히 내면을 산책시키기에 최적화된 곳. 잔잔히 흐르는 곳. 알록달록 무지개 빛깔의 테트라포드만이 바닷가 위에서 조용히 위용을 뽐내고 있는 곳이었다. 거리에는 간혹 당차게 고개를 내미는 아기 고양이들과 소일거리를 끝내고 잠시 한숨을 고르시는 어르신들, 수다스럽게 재잘거리며 간간이 고요를 깨우는 제비들뿐이었다. 이런 곳이라면 오랜만에 한숨을 고르기에 딱 좋아 보였다.



대진 해수욕장과 어달 해수욕장 사이 인적 드문 바닷가에 위치한 숙소로 향하는 길에 탈 수 있는 버스가 없었던 뚜벅이 여행자는 불가피하게 택시에 몸을 실었다. 그 덕에 운 좋게 만난 묵호 토박이 기사님께 살가운 말씨도 건네볼 수 있었다. 혼자 여행을 하면서 나누는 현지인과의 소통은 늘 나와는 다른 생활 방식을 들여다보게 하고, 이전에 해보지 못했던 생각을 불어넣어 주곤 한다.


“기사님, 묵호에서는 어떤 걸 보고 가면 좋을까요?”

“어달항 앞에서 물회 한 접시 어떠세요? 오늘 같이 볕 좋은 날엔 묵호 전망대 올라가 보셔도 좋고요. 여기가 예전에는 도심이었는데... 지금은 대중교통도 많이 다니지 않는 조용한 마을이라 아마도 계속 택시를 이용하시는 편이 좋을 거 같아요. 그리고 묵으시는 숙소 쪽이 일출은 장관일 텐데, 내일 아침에 꼭 보세요!”



하와이 자외선 부럽지 않게 쨍한 햇살이 온 살갗을 다 태울 정도로 일렁이는 6월이었지만,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는 무작정 대진 앞바다부터 묵호항까지 걸었다. 큰 길목에서 쉴 새 없이 작은 길목으로, 가파른 동산으로, 샛길로 새며. 발길 닿는 대로 들어간 어달항 앞 막 썰어 횟집에서는 1년에 한 번꼴로 잡힌다는 청어를 운 좋게 대접받았다. 귀한 생선을 드셨으니 올 한 해는 복 받으실 거라는 자질구레하고도 풍족한 덕담과 함께. 그러고는 길고양이들이 산책길을 함께 내달리는 아기자기한 언덕배기의 ‘논골담길’, 굽이치는 계단을 어지러이 따라 올라가면 마침내 묵호의 정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묵호 등대’, 비좁은 골목 사이를 요리조리 뚫고 다니다 보면 어느새 도착하는 바다가 보이는 LP 펍 ‘바람의 언덕’까지. 서울 촌놈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유려한 풍경들이 끊임없이 펼쳐졌고, 정겨운 흙길을 따라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묵호의 포근함에 흠뻑 빠져버렸다.



그러고는 숙소로 돌아가 오랜만에 단잠을 잤다. 서울의 자취방에서는 잠드는 밤마다 일말의 빛도 허락하고 싶지 않아 칼같이 암막 커튼을 치고 지냈었는데, 오늘만큼은 커튼을 모두 열어젖히고 여명을 기다리며 잠들었다. 새벽 5시에 간신히 눈을 뜨고 목도한 일몰은 과연 장관이었다. 붉은빛이 온 바다와 하늘을 수놓은 채 강렬히 타오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영화 <바닐라 스카이>에서 톰 크루즈가 꿈속을 배회하던 장면 속으로 들어온 듯 몽환적이었다. 상반기를 다 보내고 도착한 묵호에서 왠지 새해의 일출을 다시 마주한 것만 같았다. 그래서일까. 뭐든 다시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용기가 샘솟기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 묵호를 떠나기 전 남겨진 잠깐의 시간 동안, 서둘러 감추사를 찾았다.


‘한평생 부처의 마음처럼 살아가게 해 주세요. 더 이상 무언가에 집착해서 나를 잃지 않도록 해주세요.’


옥빛의 한섬 바다가 감도는 자그마한 사찰에서 연신 절을 하며 빌고 온 내 마지막 소원이 왠지 꼭 이루어질 것만 같다. 오늘의 여행처럼 퇴사 후에 놓인 새로운 출발선 앞에서는 부디 과열되지 않고 잔잔하고도 느릿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다시 한번 다짐한다. 느릿함과 열정이 적당한 온도로 공존하는 매일을 살아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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