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내가 퇴사한 이유
“고소한 원두로 드릴까요, 산미 있는 원두로 드릴까요?”
늘 열정의 하루를 사는 내게 카페인은 필수였고, 매일의 피로를 이겨내는 수단이었다. 나는 의욕이 체력을 훨씬 앞지를 만큼 의욕이 과한 사람이니까. 그런 사람이 진정한 커피의 맛을 알 리가 있었겠는가. 복숭아 노트든, 초콜릿 노트든 그 맛의 차이를 느낄 새는 없었다. 그저 잠에서 깰 수만 있다면야 그 어떠한 커피든 땡큐였다. 많은 이들이 꿈꾸는 대기업 공채에 합격해 총기 그득한 신입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내게는 필수재였던 하루 커피 2잔. 어떤 사람들은 어디 커피가 맛있다며 우르르 달려가 커피의 맛을 음미하는 여유를 보였으나, 지난 3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매일 3인분가량의 일을 쳐내던 내게는 늘 커피보단 카페인이 우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커피의 도시 시애틀에 당도했다. 블록의 코너마다 카페가 즐비한 곳이었다. 그러니까 한 블록마다 코너가 4개이니 블록당 총 4개의 커피 전문점이 있는 셈. 여기에도 있는 스타벅스가 자그마한 횡단보도 건너에도 있으니 '과연 저 카페에도 사람이 많을까' 생각할 법도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쪽도 바글바글.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리스타 대회에서 온갖 금·은·동을 휩쓸고 돌아온 쟁쟁한 실력자들이 가득 모여 저마다의 다채로운 맛을 뽐내고 있었다. 아몬드 크루아상과 함께 마시는 모닝커피가 매일을 여는 루틴인 시애틀인들 틈에서 한가로이 지내던 나는 진짜 커피의 맛을 알아버렸다.
진짜 커피의 맛을 알아버렸다는 건 인생에도 한 움큼의 여유가 자라나기 시작했다는 것. 그렇게 내 삶의 양상도 점차 변해갔다. 생존 수단이었던 커피가 어느새 행복 수단이 되었고, 이제는 기쁨을 위해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피로에 찌들지 않은 날에는 쨍한 햇볕 아래로 나아가 커피의 향을 음미하는 시간을 가지곤 한다. 오늘의 커피와 내일의 커피가 어떻게 다를지 궁금해하는 시간이 일상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그게 곧 인생을 따스히 대하는 태도로 자리했다. 그리 낭만이 스며든 삶에는 더 이상 전투적인 편린들이 차지할 만한 공간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게 내가 어느 날 아무런 계획 없이 퇴사를 감행하게 된 결정적 동인. 그리고 다소 충동적으로 보였을 수도 있었던 그 용기의 한 걸음은 나를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로 들여다 놓았다.
거창한 성취보다는 소박한 만족. 욕심에 과열된 마음보다는 말갛게 자리 잡은 여유. 그 안에서 나만의 행복이 자잘히 쪼개져 차츰 풍성해지고, 나는 그런 행복을 차근히 드립해 뭉근히 마신다. 그 온도가 적당하니 왠지 향이 더 깊어지는 것만 같다. 아. 이런 게 진짜 향기로운 인생이지.
“사장님. 오늘은 시트러스 계열 노트에 산미가 살아있는 케냐 원두요. 드립으로 마실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