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직전, 무작정 하와이 여행을 떠났다.
"길을 잃어야 길을 찾게 되지." - 영화 <무파사: 라이온 킹> 中
2024년 가을, 나는 가파른 절벽의 끝에서 과감히 날아올랐다. 그 끝이 어딘지도 모른 채로.
조직 안에서 오고 가는 날카로운 말들, 소리 없는 권력 암투, 나를 번아웃에 절여놓은 일 더미, 그리고 흥미를 잃은 지 오래인 직무까지. 그 어느 하나도 내가 더 이상 이 회사에 발붙이고 있도록 도와주질 않았다. 입사 초기, 누구보다 밝은 에너지로 사람들을 즐겁게 했던 나는 모두 소진되고, 내 반짝이던 자리마저 기울어 가고 있었다. 끝도 없는 우울감에 휘말려 허우적거리던 내게는 더 이상 물러날 공간이 남아있지 않았고, 망가질 대로 망가져버린 건강 상태가 그 상황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어느 날 다소 무모해 보일 만큼 대담한 선택을 감행했다. 이름하여 '대기업 정규직 무계획 생 퇴사'. 그 결심의 과정이 어땠냐고. 사실 무척이나 험난했다.
끔찍하리만큼 침잠하곤 했던 우울의 계절이 느릿하게 흘러가는 동안 나를 꽤나 오래 버티게 한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수영. 오랜 세월 물공포증을 안고 살아왔던 나지만, 음울하던 당시에 유일하게 용기를 냈던 일이다. 출근하기까지 한참이나 남은 새벽 5시, 매일 살을 에는 겨울바람을 세차게 맞으며 동네 수영장으로 향했다. 어떻게든 가라앉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었다고나 할까. 아무도 활보하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을 헤치며 매일을 그렇게 열었다. 물속의 유영, 그중에서도 특히 잠영은 내가 소란스러운 세상에서 오롯이 숨어버릴 수 있던 순간이었으니까. 그 시절에는 한참을 헤엄치다 아침 6시쯤 창을 뚫고 물속으로 번지던 한 줄기의 햇살을 사랑했다. 그 볕이 슬픔에 잠식당했던 당시의 내게는 너무나 반가운 희망이었으니. 한 번은 그 햇살 줄기를 졸졸 따라다니다 아주 오랫동안 물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적도 있었다. 물속의 유영을 과하게 즐긴 나머지 어느 날은 나름 단단했던 종아리가 파열되어버렸고, 한동안 회사에 얼굴을 비추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간신히 버텨내던 위태로운 회사 생활이 더 이상 동네 수영장에서의 유영으로만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로 휘청이게 됐을 때, 나는 더 큰 물에서 유영하기 위해 그동안 차곡차곡 모아두었던 연차를 쓰고 무작정 하와이로 떠났다. 그 여행에서 특히나 내 유영 인생의 시작에 큰 획을 긋게 된 잊지 못할 장소가 생겼다. 자연보호 구역으로 지정돼 하루에 한정된 수의 방문객만 받는 프라이빗한 곳, 하나우마 베이. 인간의 흔적들을 쉬이 허용하지 않기에 완전한 자연을 생생히 마주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한국에서 챙겨간 튼튼한 스노클링 마스크를 쓰고, 형형색색의 물고기들과 자유로이 유영하기 시작했다. 바닷속에서 그들과 눈짓으로 인사하며 하루 반나절을 쉬지 않고 헤엄치다 어느덧 나는 깊고 넘실대는 곳에서의 수영이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마침내 움켜쥐고 있던 껍질을 깨고 나와 거대한 세상을 마주할 용기를 얻었다.
꿈만 같던 하와이 여행에서 돌아와 시원하게 사직 의사를 밝힌 뒤로는 예상보다 더 긴 시간을 견뎌내야만 했다. 성실히 몸 담았던 회사를 나오는 일이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 한때는 꿈이었던 직무, 한때는 일해보고 싶었던 팀까지. 거절하기엔 너무나 아까운 제안들이 수중에 밀려왔고, 나는 또 그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진한 고뇌의 시간을 보냈다. 단단한 계획 하나 없이 막연한 꿈만이 둥둥 떠다니는 퇴사가 혹여 나를 망칠까 봐 그 또한 무척이나 두려웠다. 온 힘을 다해 쥐고 있던 값진 것들을 한순간에 미련 없이 놓아주기.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인정하기. 퇴사를 앞두고, 달콤한 선택지 앞에서 수도 없이 반복했던 연습이다. 그러고는 마침내 꼭꼭 씹어 삼킨 고민들을 모두 뒤로한 채 그간 견고히 쌓아왔던 자리에서 깔끔히 물러났다.
그로부터 3개월의 시간이 흘렀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집채만 한 우울도 드디어 끝이 났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무리하여 헤엄치지 않아도 두 발로 씩씩하게 뚜벅뚜벅 걸어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작고 소박한 일상의 조각들을 모으고 모아 패치워크 하며 만들어가는 인생도 꽤 괜찮은 것 같다. 앞으로도 이렇게 몸에 힘을 쭉 빼고 늘어트린 채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기를. 한낮의 쨍한 햇살이 창문을 뚫고 들어와 눈가를 간지럽히는 카페에서, 여유로이 한낮의 뜨개질을 즐기는 사람들 곁에서, 이런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내 모습이 어쩌면 불안하기는 해도 제법 마음에 든다. 나는 이게 나만의 길인 것 같아서.
부디 유유히 흘러가고 싶다. 유유자적하게 흐르고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