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한산도 대첩에서 치명적인 피해를 본 일본은
그 후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루이스 프로이스가 기록하길
조선군은 일본군보다 해전에서 우수해 일본군에게 커다란 피해를 주고 다녔다
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렇듯 한산도 대첩에서
대패했다는 보고를 받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크게 충격 받았습니다
일본 육군은 파죽지세로 북진하였기에
해군 또한 쉽게 바다를 장악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육군과 수군이 동시에 진격하는
수륙병진 전략입니다
서로 보급을 지원하며
신속하게 진격하는 전략을 세웠었습니다
그러나 한산도 대첩 이후 일본 수군의 주력이 괴멸되고
남해안의 제해권을 상실하게 되자
조선에 머물고 있던 일본 육군에게
보급품을 전달하는 것이 차질이 생겼죠
그렇기에 일본군은 더는 진격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도
보급 문제에 시달렸죠
한산도 대첩은 1592년 8월 14일이며
일본 해군 작전 중단 명령은 약 8월 23일 이었습니다
히데요시 입장에서는
자존심과 권위가 흔들리는 패배였습니다
결국 부산에서의 해군 작전을 중단하고
조선 내에서 방어에 강화하라는 명령을 했습니다
이 의미는 바다에서는 조선,
즉 이순신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 한 겁니다
한산도 대첩에서 일본군이 입은 피해는
기록에 따라 나뉘지만
약 59여 척이 격침되었으며
전선을 거의 잃었다는 점이
일본 수군에게 치명적이었습니다
심지어 사살된 일본군은
약 3000명 내외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주로 백병전으로 해상전투를 치르던 일본군이
조선군의 체계적인 전술에 번번이 당하자
어느새 일본 수군에게는
해상전의 공포심이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한산결국 일본은 해상 주도권을 포기하고
방어적 태세로 전술을 바꿨으며
왜성을 건설하며 교착 상태로 전환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https://youtube.com/shorts/UGXPGi9nZ-s?si=lrz35QrrYjn54WD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