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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작가 Sep 29. 2023

역사:자식을 죽인 조선의 왕 영조

생각할 사, 슬퍼할 도, 사도세자

1757년 6월 (영조 33년)

사도세자가 사람을 죽이자

궁궐 내에서는 공포와 긴장감이 맴돌게 됩니다

내관 김한채를 죽이고서 

그 머리를 들고 들어와

사도세자는 내인들에 효시하였습니다


"그때 사람 머리 벤 것을 처음 보았는데,

흉하고 놀랍기가 이를 데 없었다."

-혜경궁 홍씨


사도세자는 사람을 죽인 후에야 

마음이 풀린다 하였으며

그때 당시, 내인을 여럿 죽였다고 기록했습니다

또한 1760년에는 내관과 내인이 죽고, 

다친 일이 많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그중에서 도드라진 것은 

내수사 서경달이 물건을 늦게 가지고 와

사도세자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여

내수사 서경달을 죽였다고 합니다


또한 어느 날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가 던진 바둑판에

맞아 눈을 심하게 다치고 말았습니다

또 1761년 1월에 옷을 갈아입다가 그만

의대증이 발병한 사도세자는 자신이 

애정하는 후궁 빙애를 죽여버리고 맙니다

거기다가 빙애의 자식인 은전군을 

칼로 때리고, 연못에 던졌으나

대신들이 사도세자를 말리고 

연못에 뛰어들어가 은전군을 겨우 살렸다고 합니다


대천록

대천록에 의하면 

세자가 죽인 중관, 내인, 노속이

대략 100여 명에 이르렀고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병이 심할 때에는 궁비와 환시를 죽였고, 

죽인 후 후회를 하곤 했다고 합니다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묻길


"왜 사람을 죽인 것이냐."


"마음속에서 화가 올라와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사람이나 닭 같은 짐승을 죽여야

마음이 풀립니다."


"어찌하여 그러하느냐."


"마음이 상하여 그럽니다. 부왕께서 사랑하지 않으시기에

서럽고, 꾸중하시기에 무서워 화가 되어 그러합니다."


"내 더는 그러지 않으마."


이렇게 조선의 무자비한 살인마로 기록되어 있는 

사도세자, 그는 대체 왜 

사람들을 무차별하게 죽였을까요? 


사도

사도세자는 의대증이 있었습니다

의대증은 말 그대로 옷 입기를 어려워하는

일종의 강박증 형태의 병입니다

한 벌의 옷을 입기 위해서는 

수십 벌의 옷을 준비해야 했으며

겨우 한번 입은 옷은 

옷이 다 헤질 때까지 입어

나중에 가서는 행색, 몰골, 옷차림이

말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또한 궁녀들이 사도세자에게 옷을 입힐 때 

살에 옷이 닿으면

가차 없이 칼로 베어 죽였으며

사도세자가 애정한 후궁 빙애 또한 

수발을 제대로 들지 못한다는 이유로

죽여버리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세자는 한 벌의 옷을 입기 위해

수십 벌을 늘어놓고 귀신에게 기원하며

불을 지르는 등 이상행동을 보였다고 합니다 


과연 이런 이상 증세는 어쩌다가 

생기게 된 걸까요? 

영빈 이씨_사도

사도세자는 1735년 (영조 11년) 후궁 영빈 이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나게 됩니다

이때 영조는 42세의 고령의 나이로 

사도세자를 얻었으며 영빈 이씨 또한 40세의 고령의

나이었습니다


영조에게는 장남 효장세자가 있었지만 

7년 전에 세상을 떠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사도세자의 탄생은 영조에게 큰 행복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서는 평균적으로

40대에 손자를 보고

50대에 죽었습니다

조선 국왕들 평균 수명 또한 대략 47세 였으니

영조는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83세까지 장수해 조선 역사상 최장수 군주로 기록된다.)


그렇기에 영조는 사도세자가 천재이길 바랬습니다 

그런데 그의 바람대로 사도세자는 어린 나이부터

총명한 모습을 보였으며

2살에 천자문을 배워 60자를 써내었으며

3살에는 식사 도중 영조가 사도세자를 부르자

입에 있는 밥을 전부 뱉고 답했습니다


"왜 그러느냐?"


"소학에서 배우길 부모가 부르실 때는


입에 있는 걸 뱉고 말하는 게 효라고 배웠습니다."


라고 답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영조는 사도세자에 대해 기대감과 기특함이 

날이 갈수록 높아졌습니다

또 어느 날에는 비단과 무명을 놓고

나인들이 묻기를


"어느 것이 사치고, 어느 것이 사치가 아니 옵니까?"


이때 사도세자는 비단을 집어들고서 이것은 사치이며

무명은 사치가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기록은 한중록과 영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으나

이미 이때부터 주입식 교육으로 인해 

크게 세뇌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영조의 완벽주의와 

자신의 대한 콤플렉스와 스트레스로 

사도세자를 망가뜨리기 시작합니다

태어난 지 100일도 채 안 지난 자식을

어머니와 떨어트려 

저승전에서 머물게 하였으며

동궐도

취선당에서 세자를 위한 음식을 만들게 하였습니다

이때, 취선당은 희빈 장씨가 머물면서

인현왕후에게 저주를 퍼부었던 곳입니다 


심지어 영빈 이씨가 사도세자를 낳았으나

세자가 되면서 정성왕후 서씨의 양자로 

입적이 되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정성왕후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한중록을 토대로 보면 영빈 이씨는

6살에 궁궐에 들어와 궁녀가 되었는데

영조는 자신처럼 사도세자에게 흠이 되는 사건은 

남기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닐까? 라는

추측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신이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과 

더불어 어린 나이의 사도세자를 혼자 두고 떠나면

주변으로부터 잡혀먹힐 게 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영조는 사도세자가 4살이 되던 해부터

사도세자를 구박하고 혼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기대가 컸기 때문에 

사도세자가 조금만 흐트러지고, 실수하여도 

영조의 성에 차지 않았으며 

혼을 빈번하게 냈습니다

그러자 사도세자가 9살이 되던 해


"부왕을 뵙기가 두렵다."


라고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이는 점점 엇갈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날씨가 흐린 것을 보고서


"세자의 덕이 없어서 그렇다."


라며 꾸짖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사도세자는 매일 궁인에게 묻길


"오늘은 날씨가 어떤가?"


라며 날씨에 대해서 집착을 보였습니다

그 방증으로

정성왕후의 서씨의 병이 깊어지자

병시중을 직접 들러 온 사도세자가

정성왕후가 피를 토한 모습을 보고서

눈물을 흘렸지만

영조가 오자마자 울음을 멈추고

방 한구석으로 비켜가 웅크리고 겁에 질려

떨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정성왕후가 아픈 것마저

자신을 탓할까 봐 두려움에 떤 것입니다

결국 심한 위축으로 인해 

사고방식이 좁아진 사도세자는 

영조가 물어도 대답도 잘하지 못했으며

대답을 하여도 영조의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구박을 받으니 정서적 불안함이 극대화 됐습니다

여기서 사도세자가 우울증에 걸렸다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우울증에 걸려도 시야가 좁아지고

결정 능력, 의사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고 합니다 

혜경궁 홍씨의 말에 의하면


"두 분의 성격은 너무나 극명히 다르며,

특히 영조는 신하들 앞에서 

사도세자를 세워놓고 가차 없이 망신을 주고

흉을 보았습니다.

또한 어떠한 대답을 하여도

다른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망신을 주었으며

심지어 비가 와도, 천둥이 쳐도, 가뭄이 들어도

세자 탓을 하였습니다." 


1743년 9월에 사도세자가 어지럼증을 호소하자

스승들이 영조에게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얘기했으나

영조가 말하길


"세자는 책만 보면 어지럽다고 했다. 

그러니 치료할 필요가 없다."


라고 했으며

또한 사도세자에게 질문을 하면 

자기를 속이는 답변이라며 반박했고

세자의 기질상 이렇게 대답할 리가 없다며

트집 잡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결국 인원왕후 김씨, 신하들조차도

영조에게 말하길


"세자를 너무 혼내십니다."


"세자저하가 대답을 못하는 이유는

전하를 너무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라는 등의 충언을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사도

시간이 지나 영조는 자신이 왕위에 대한 

욕심이 없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또한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영조는 선위를 자주 행했습니다


"계속 신하들이 노골적인 당파 싸움만 하니

왕 노릇도 못 해 먹겠다.

이게 다 내가 부덕한 탓이니 왕위에서 내려와야겠다."


이렇게 말하자 신하들은 극구 반대하였으며

세자 또한 신하들과 찾아와 싹싹 빌며

영조가 계속해서 왕의 노릇을 하기를 바랬습니다

이때, 영조가 선위하는 행동에 동의할 시

금상에 대한 역모나 반역 행위로 몰아갈 수 있기 때문에 

저절로 왕권 강화와 당파 싸움을 중재하기 위해서 

영조가 자주 이용하고는 했습니다

여기서 조선 역사상 석고대죄를 가장 많이 한 인물로

사도세자가 거론되고는 했습니다


결국 영조는 대리청정이라도 하겠다며 

사도세자를 내세웁니다

말로는 대리청정으로 지켜만 보겠다고 했지만

영조의 말과 행동은 어불성설이었습니다

함경북도 성진에서 길주로 

방어기지를 옮기자는 상소에 


"그렇게 하여도 성진을 지킬 병사가

남아 있겠느냐?"


그러자 영의정이 대답하길


"남아있습니다."


"그러면 방영을 길주로 옮기는 것이 맞을 듯하다."


그러나 뒤에서 지켜보던 영조가 버럭 화를 냅니다


"네 말이 비록 옳기는 하다만 방영을 성진으로 옮긴 것은 나의 뜻인데, 

길주로 다시 옮기는 것은 경솔하지 않더냐? 

나에게 먼저 물어본 뒤 시행하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 


결국 지켜만 보겠다 하던 영조는

첫날부터 사도세자에게 꾸지름을 주었고

이유도 단순히 자신이 해놓은 결정을

바꿨다는 이유로 화를 낸 것이었습니다

결국 대리청정이라고 하여도

영조의 의사를 물어보고 결정을 해야 했으니

말만 대리청정이게 됩니다


또한 영조는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들으면

귀를 씻는 버릇이 있었는데

귀 씻은 물은 사도세자나 화협옹주의 

처소 쪽 방향으로 다 버리게 했습니다

나중에 가서는 사도세자에게 밥 먹었느냐고 묻고서

먹었다는 대답을 들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귀를 씻었다고 합니다

마치 안 좋은 말을 듣기 전 

미리 액땜하는 용으로 사용했던 것이죠



사도

사도세자가 18살이 되던 해, 겨울

궐내에는 홍역이 발생해 세자를 비롯해

왕족 몇 명이 홍역에 걸리게 됩니다

그당시 홍역은 굉장히 무서운 병이라

걸리면 생사를 오고 갈 정도였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영조는 대리청정을 잘못했다는 이유로

사도세자를 질책했습니다

그러자 병이 낫는 대로 사도세자는 쇠약한 몸으로

눈이 펑펑 내리는 걸 맞으며 

사흘동안 엎드려서 머리를 박고 있었습니다


1752년 사도세자를 유독 애달파하며 챙겨주었던 화협옹주가

홍역으로 죽은 지 2주도 채 지나지 않아 

영조는 선위를 하겠다고 파문을 일으키자

1752년 12월 8일부터 19일까지 열흘 가까이 되는 동안

사도세자는 눈밭에서 석고대죄하게 됩니다

여기서 영조는 그 모습을 보고서


"내 시를 읽을 테니, 네가 울면 효성이 있는 걸로 알아

전교를 거두겠다."


라고 했으며

세자의 석고대죄가 소극적이면 그 모습에 화가 나

호통을 쳤습니다

결국 사도세자는 바닥에 머리를 쾅, 쾅하고 찍어

피를 내게 됩니다

결국 이 상황은 대비가 나서서 제재하였고

드디어 전교를 거두게 됩니다


시간이 흘러 자신을 예뻐해 주고, 사랑해주던 

인원왕후 김씨와 적모 정성왕후 서씨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사도세자는 그만 

정신 줄을 놓기 시작합니다

1752년 역술인 김명기를 통해 

도교의 주문인 옥추경을 받아 읽었는데, 

그해 겨울쯤부터 옥추경에 등장하는 

신인 뇌성보화천존의 환각이 보인다며 소리쳤고

궁녀를 잔혹하게 죽이는 등 갖가지 기행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1756년 영조는 낙선당에 갑자기 들이닥칩니다

사도세자의 엉망인 행색과 몰골을 보고서


"너 술 마셨니?"


이때 무슨 대답을 해도 믿어주지 않을 거로 생각한

사도세자는 이 상황을 빨리 끝내기 위해 

먹었다고 대답하게 됩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상궁이 말하길


"술을 잘 드시지 않사오니 

냄새가 나는지 한번 맡아보소서."


라고 영조에게 대신 항변했습니다

그러자 사도세자가 괜한 말을 한다며

상궁을 꾸짖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영조는 자신 앞에서

상궁을 꾸짖는다며 사도세자를 되레 혼냅니다

그리고 영조는 춘방의 신하들에게 

사도세자를 훈계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영조가 나가자 사도세자가 말하길


"옆에 있는 상궁이 내가 억울한 말을 들어도

대신 억울함을 호소해주는데 너희는 아무도 나서지 않는구나,

어서 나가라! 모두 내 눈앞에서 사라지거라!"


라며 춘방 신하들을 내쫓았는데 

이 과정에서

촛대가 쓰러져 낙선당에 불이나게 됩니다

심지어 그 불길이 근처의 관의합에 있던 

세손의 거처로 번지게 되었으나 

다행히 불길이 방향을 틀어 한숨 돌리게 됩니다

영조는 이 소식을 듣고서는 

모든 신하들이 보는 곳 앞에서

세자를 호통쳤습니다


"네가 불한당이냐? 이제 불까지 지르는구나!"


1758년 영조실록에 기록되길

세자를 대하는 영조의 태도가 너무 가혹하다며

도승지 남태희가 찾아와 울면서 고하게 됩니다


"전하께서 저하를 지나치게 엄하게 대하시니, 

조금만 관용을 베풀어 주십시오."


이때 가장 많이 의견이 충돌한 노론과 소론도

영조에게 세자에 대하여 태도가 너무 가혹하다라는 

충언은 꾸준히 올리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60년 여름,

가뭄이 심각해 백성의 고통이 들려오자

영조가 말하길


"다 세자의 덕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라며 답했습니다



사도

1762년 제 아들, 이산(훗날 정조)의 결혼식 날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도리옥관자라고 갓을 쓰기 전에 착용하는

단추 같은 게 있습니다

그러나 도리옥관자가 보이지 않자

사도세자는 급히 다른 걸 착용하였습니다

경사스러운 날에 영조가 사도세자를 훑어보더니

도리옥관자가 없다는 것을 보고

불과 같이 화를 내며 행사장에서 

사도세자를 내쫓았습니다

결국 사도세자는 자신 며느리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돌아가게 됐습니다

물론 이산이 주인공이지만 아버지이자 세자였던

사도세자의 자리도 중요했습니다

아버지가 없다는 걸 본 이산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결국 늦은 야심한 밤

사도세자는 칼을 든 채 어디론가 향하게 됩니다

목적지는 경희궁

거긴 영조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칼을 차고 가서 어떻게 해버리고 싶다."


사도세자가 경희궁을 가기 전 한 말입니다

즉, 반란이자 반역, 역모였습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영빈 이씨는 영조를 찾아가

자기 아들을 죽여 달라 요청하게 됩니다

이 사건을 알게 된 영조는

사도세자를 부르게 됩니다


"세자의 이름을 잃지는 않을 것이니

속히, 자결하라."


호위무사가 들고 있던 칼을 뺏어 던졌습니다

그 모습에 사도세자는 무릎을 꿇고 

간절히 용서를 빌었습니다


"소자 죄가 큽니다만, 죽을죄까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내가 죽으면 나라가 망하지만, 네가 죽으면 300년 종사는 보존할 수 있다."


변함없는 영조의 눈빛을 본 사도세자는 

포기하고 칼을 들어서 자결하려고 하자

주변의 신하들이 달려와 사도세자의 자결을 막았습니다

그러자 영조가 말하길


"뒤주, 뒤주를 가져오라."


여기서 사도세자를 사형시킬시 그가 죄인이 되기 때문에

훗날 이산(정조)가 즉위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영조는 사도세자가 스스로 자결하는 선택을 권했습니다

결국 그날 자정 사도세자를 폐세자로 만들었으며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있다가 그만 

겁에 질려 뒤주를 부수고 도망쳤습니다


"세자를 잡아오라!"


결국 영조는 뒤주에다가 직접 무거운 풀더미를 올리고

밧줄로 꽁꽁 묶어 세자가 다시는 도망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8일이 되던 날 

사도세자는 뒤주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끝내 한쪽 무릎은 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생각할 사, 슬퍼할 도. 사도세자라 하여라."



https://youtu.be/PT5VkdS0UhY?si=g7VXVFU7ei3Pu4k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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