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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코아 Feb 02. 2024

혼술의 미학

하라다 히카의 낮술을 읽고

오늘 낮에 혼술 한 잔 어떠세요?






 <낮술>



술 자체를 좋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술이 있는 자리의 분위기를 좋아했던 것뿐.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 으슥해진 해 질 녘의 한기가 원인인가. 갑자기 '혼술'이 한잔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냉장고를 여니 집들이 때 먹다 남은 소주 한 병이 있었다. 집 앞 해장국집에서 편육과 소머리 순대 해장국 한 그릇을 사 왔다. 순댓국에서 살이 오동통 오른 순대와 비계가 적당히 붙은 소머리 고기를 숟가락 가득 떠서 입에 넣었다. 묵직한 고기의 쫄깃함이 기분 좋게 이를 자극한다. 그리고 끝 맛으로 느껴지는 들깻가루 향. 들깻가루가 신의 한 수였던 듯. 고소하고 깔끔함을 함께 가져다준다. 냉장고 찬바람을 착실히 맞은 소주를 까서 소주잔에 한 잔 따랐다. 찰랑찰랑 넘치지 않을 정도로만. 그리고 한 잔. 알싸한 소주가 청량하게 목구멍을 훑고 지나간다. 혼술이라고 하면 뭔가 청승맞아 보였는데 이런 기분이라면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술자리가 아니라 술 자체를 느끼기 위해서 술을 마신 건 처음이다. 뭔가 색다른 기분. 이런 게 어른의 맛인가.





최근 <윤숙희, 혼술하는여자>라는 유튜브 채널에 빠졌다. '혼술'의 맛을 알고 난 이후, 혼술을 자주 할 순 없으니 대리만족을 느낄 프로그램을 찾다가 유튜브에서 발견했다. 음식에서 술로 주체가 바뀐 것뿐. 먹방과 같다고 보면 된다.

나보다 몇 살 많은 언니인 윤숙희는 주로 서울의 여러 동네를 다니면서 말 그대로 혼술을 즐긴다. 백반에 한잔하기도 하고, 포장마차에서 개불과 함께 한잔하기도 하며, 편의점 앞에서 컵라면과 한잔하기도 한다. 정말 말 그대로 혼자서 술 마시는 게 다인 영상. 그런데 이게 왜 그렇게 편안함과 만족감과 애틋함을 함께 가져다줄까. 이 언니 도대체 무슨 매력이지. 매일 한 시간씩은 보고 있다.





하라다 히카의 <낮술>도 일맥상통하게 '혼술'을 다루고 있다. 주인공 쇼코는 30대 이혼 경력이 있는 딸아이 한 명을 둔 여성이다. 대학을 졸업한 지 얼마 안 돼서 술자리에서 알게 된 남자와 짧은 연애 중 덜컥 임신을 해버려 우당탕 해버린 결혼. 그리고 이혼. 전 남편은 사내 외도로 의심했던 여자와 재혼해서 새로운 아이를 가졌다. 그 와중에 커가는 쇼코의 딸. 이혼 후 먹고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된 직업인 '지킴이'. 밤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누군가를 지켜봐 주는, 말 그대로 '지킴이'를 하는 일이다. 저마다의 사정으로 누군가를 잠시 남겨두고 집을 비워야 하는 사람들이 쇼코를 찾는다. 어린아이를 남겨두고 일을 나가야 하는 엄마, 아픈 노모를 두고 마감업무를 해야 하는 아들. 한차례 인터넷을 통해 연애 사진이 유출된 이후 손에서 폰을 놓지 못하는 딸을 위해 쇼코에게 지킴이를 의뢰한 엄마. 그냥 자는 걸 지켜봐 달라고 부르는 사람들. 아픈 반려견을 남겨두고 외출해야 하는 사람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로 '지킴이'가 필요하다.


쇼코의 지킴이 고객들을 만나는 내내 내게도 지킴이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유독 외롭고 쓸쓸한 날. 가족이나 친구에게 쏟아질듯한 이 울분을 토해낼 에너지도 자신도 없는 날. 철저히 혼자가 되고 싶은 날. 그렇지만 어둑해지는 창밖을 보며, 복도에서 울리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조금 무섭고 누군가 곁에 있으면 좋겠다고 느껴지는 날들. 설명할 수 없는 양가감정이 끊임없이 나를 파고드는 날들.


그럴 때 지킴이가 옆에 있으면 참 좋겠다 싶다. 내 인생에도 그런 지킴이가 있었는데, 보건센터 상담선생님이다. 대학교 4학년 때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판정받은 이후로 삶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수많은 병원을 찾았다. 하지만 내게 병원은 답이 아니었다. 물론 우울도 호르몬의 장난이라는 말에 맞게 약물은 안정을 찾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병원은 약을 지어주는 곳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내게는 사람이 필요했다. 어떤 대가도 없이 내 말을 들어줄 사람. 가족과 친구들은 내게 힘이 되어주었지만 언제까지고 그들을 감정쓰레기통 취급하면서 나의 고됨을 털어놓을 순 없었다. 어느 순간 오히려 내가 그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내가 또 부정적인 말을 한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내가 지금 이런 상태라 그것도 그렇게 해석하는 거야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그런 불안들은 오히려 내 입을 닫게 만들었다. 그래서 진짜 내 감정을 아무런 대가와 부담 없이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때 선생님을 만났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만나 내 우울과 공황에 대해 얘기했다. 선생님은 어떤 해결책도 제시해주지 않고 묵묵히 내 말을 들어주기만 했지만 내겐 그거면 충분했다. 내가 뱉는 말을 정제하지 않아도 되는 것. 청자의 기분을 고려하고 의도를 파악하지 않아도 되는 것. 그게 나에겐 참 감사했다. 선생님이 내겐 지킴이 그 자체였다.  덕분에 나는 잘 회복해서 다시 건강한 정신을 가진 직장인으로 사회인으로 딸로 친구로 살아가고 있다.



단순해 보이는 '지킴이'라는 업무는 생각보다 '누군가를 지켜본다는 것'만으로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일이다.(선생님도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참 감사하다.) 아침에 일을 마친 쇼코는 홀로 쓸쓸히 맞이해야 할 집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 식사로 낮술 한잔할 수 있는 식당을 고심해서 고른다. 퇴근하고 나서 먹는 술 한 잔. 이 얼마나 달콤한 말인가. 음식 한 점에 술 한 잔이 쇼코의 하루를 말끔히 씻어내려 준다.



쇼코는 단순하지만 꼭 필요한 '지킴이'라는 일을 통해서 여러 사회의 단면을 품은 사람들과 섞이며 본인 스스로 인생에 대한 답을 찾아나갈 힘을 얻게 된다. <낮술 1,2,3>권을 따라 쇼코와 함께 여러분의 인생도 헤쳐나가 보기를. 조금 더 에너지가 필요할 때는 당장 당기는 맛있는 음식과 술 한 잔을 곁들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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