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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코아 Feb 09. 2024

지속가능한 사랑이란

정세랑 작가의 지구에서 한아뿐을 읽고

유효기간 없는 사랑을 원해요.







정세랑 작가는 묘한 상상력에서 기인한 과감한 인물 설정을 통해 다소 낯선 SF스러운 얘기들을 보다 익숙하게 독자에 전달하는 데 재주가 있다.

[재인, 재욱, 재훈][보건교사 안은영]도 그러했다. 나는 SF 소설을 선호하지 않는다. 게다가 러브스토리는 싫어한다. 그래서 가장 좋아하는 작가를 꼽을 때 정세랑 작가를 꼽는 이유는 그녀의 SF스러운 얘기들이 아니라 단순히 [피프티 피플] 한 권에서 비롯했다. [피프티 피플]은 내가 쓰고 싶던 소설의 전형이다. 여러 인물의 사적이 이야기, 하지만 결코 인간은 개별적일 수 없는 존재이기에 필연적으로 얽힌 사연들. 작가는 50명의 얘기를 세심하고, 부드럽고 또한 견고하게 풀어냈다. 그래서 선호하지 않는 장르의 소설이지만 정세랑 작가 소설이라면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지구에서 한아뿐]도 단순히 정세랑 작가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선택했다. 책의 소개글부터가 낯간지럽다.


외계인 경민과 지구인 한아의 아주 희귀한 종류의 사랑 이야기.
2만 광년을, 너와 있기 위해 왔어!

달디단 향기가 한 문장에서 뚝뚝 떨어져서 아무리 정세랑 작가 작품이라지만 살짝 읽기가 두려웠다.(러브스토리 알러지 있냐고!) 하지만 특유의 흡입력을 갖춘 작가의 글재주에 휩쓸려 책을 펼치는 순간 단숨에 읽어내렸다. 마지막 표지를 덮을 때, 가슴 한 가운데가 휑했다. 지구인 한아와 외계인 경민의 사랑이 뜨거웠던 만큼 내 온기를 그들의 사랑에 보태준 건지 나는 반대로 서늘해졌다.



한아는 지구를 위해 탄소발자국을 줄이는 데 진심인 의류 리폼 디자이너이다. 의류학을 전공한 대부분의 동료들은 새 옷을 만드는 데 기여했지만, 한아는 새 옷보다는 지구를 지키고 고객들의 추억도 재탄생시켜 줄 수 있는 헌 옷 리폼 디자이너를 직업으로 선택했다. '환생'이라는 작은 업사이클링 옷 가게를 운영하면서 한아는 헌 옷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소박한 삶에 보람을 느낀다. 단 한 가지, 한아의 삶에 마냥 축복이라고만 할 수 없는 존재. 11년 된 남자친구 경민. 분명 뜨겁게 사랑했는데 지금도 경민을 사랑하긴 하는데. 한와와 다르게 모든 행동거지에 있어서 자유분방하고 무계획적인 그를 보며 한아는 미래를 함께 할 수 있을까 고민하기도 한다. 경민은 그런 한아의 서운함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유성우를 보러 캐나다로 떠나버리고 경민이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어딘가 묘하게 낯설었다. 한아가 알던 경민이 아니다.



망원경의 중심 한가운데 한아가 있다. 그리고 한아를 중심에 두고 뚫어져라 바라보는 광석. 광석은 매일 망원경으로 한아를 본다. 망원경으로 수없이 많은 행성을 지켜봐왔지만 그녀만큼 아름다운 존재는 우주 그 어디에도 없다. 광석은 결심했다. 그녀를 만나러 가기로. 한아를 2만 년 광년 떨어진 어느 별에서 망원경으로 들여다보다가 사랑에 빠져버린 광석. 광석은 한아를 만나기 위해 평생 갚아야 할 빚을 져가면서 셀 수 없이 먼 거리를 날아온다. 경민의 탈을 뒤집어쓰고.



[지구에선 한아뿐]은 경민의 모습으로 찾아온 외계인 광석과 지구인 한아의 사랑을 다룬다. 종이 다르다고, 생김새가 다르다고, 그들의 사랑은 결코 가볍지 않다. 우주에서 가장 열렬하며 진득하다. 한아의 행동, 말투, 신념, 그냥 한아 그 자체를 지지해 주는 외계인 경민을 보며 부러움을 넘어 질투가 났다.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지지를 받아본 적이 있는가. 또한 내가 그런 지지를 준 적이 있는가. 사랑을 가능케 하는 건 뭘까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의문은 차올랐다.

작가는 표면적으로 특이한 사랑 얘기를 하는 것 같지만 내면적으로 환경에 대해 꾸준히 환기시킨다. 나도 한때 업사이클링에 관심을 가져서 업사이클링 하는 방법들도 찾아보고 관련 제품들도 찾아보곤 했는데 이 소설로 하여금 다시 관심이 생겼다. 특히, 한아와 경민의 결혼식 장면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헌 옷을 보태어 만든 웨딩드레스, 버린 현수막을 얻어와 만든 천막, 탄소 배출량이 적고 음식물 쓰레기가 덜 나오는 한 그릇 음식으로 준비한 식사. 모든 것들이 그 어떤 웨딩의 관습을 따르지 않았다. 내가 손에 들고 있는 페트음료가 부끄러웠다.



경민이 드넓을 우주 공간에서 한아에게 반한 것도 한아의 환경에 대한 신념 때문이리라. 끊임없이 파괴와 정복을 일삼고 오로지 발전만을 최고 가치로 삼는 인간들이 터전을 일구어낸 지구. 지구에서 드물고 별나게 동물과 식물, 이 모든 생명체를 품고 있는 지구의 미래를 걱정하는 한아. 외계 종족으로서 전쟁 없는 별에서 살아온 경민에게 그런 한아가 우주 한가운데서 유독 빛나 보이지 않았을까.



난 그들의 사랑이 너무 달콤해서 좀 씁쓸해졌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사랑이 영원하기를 응원한다. 그리고 내게도 무한대의 신뢰와 애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상대가 나타나기를, 또한 나도 그런 존재가 될 수 있기를. 지구가 좀 더 건강해져서 그 사람과 먼지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을 좀 더 오래 볼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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