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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코아 Jan 26. 2024

지독한 돈, 비통한 죽음, 그럼에도 사랑

최진영 소설 구의 증명을 읽고

마침 비가 내렸다. 나도 눈에서 비를 내렸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비가 와서. 단지 그 뿐이다. 

그런 날이 있다. 하염없이 울고 싶은 날. 울음에는 그 어떤 목적도 사정도 없다. 그냥 온몸의 묵은 떼를 벗기는 세신사의 마음으로 왈칵 왈칵 모든 케케묵어 낡아 빠진 것들을 다 끌어다 쏟고 싶은 날. 






그런 날이 었는 데 <구의 증명>을 접했다. 수학 내지 과학 지식 도서 같은 제목과 여백의 미를 살린 단조로운 하얀 표지. 그와 반대되게 상당히 감성적인 책 소개.


만약 네가 먼저 죽는다면
나는 너를 먹을 거야.
그래야 너 없이도 죽지 않고 살 수 있어.
사랑 후 남겨진 것들에 관한 숭고할 만큼 아름다운 이야기






사랑 이야기엔 관심이 없는데. <구의 증명>을 읽는 동안, 책을 놓을 수도,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사이에 그 어떤 나의 스트레스와 일상을 끌어들일 수도 없었다. 나는 그냥 '구' 와 '담'의 사랑의 개화를 만개를 그리고 끝끝내 시듦을 숨죽여 바라볼 뿐인 자간 사이에 놓인 관찰자로 존재했다.



'담'의 아주 오래 살아남아야겠다는 다짐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글쎄, 소설이 맞는 건가. 소설을 읽었다기 보다 3시간 동안 나는 어디선가 존재하고만 있을 '구'와 '담'의 일생을 엿본 것 같은데. 어쨌든 소설인지 현실인지 그 경계가 모호한 이곳은 '구'와 '담'의 생각, 독백, 회상으로 전개된다. 견문이 좁은 내게는 처음 접하는 전개였다. 



담의 시선에서 구는 길바닥에서 죽었다. 죽은 구는 꼭 술 취해 곤히 잠든 사람 같았는데, 그래서 구를 어루만지자 머리칼이 안 움큼 빠졌다. 담은 손에 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 돌돌 말아 입에 넣고 꿀꺽 삼켰다. 구가 죽었다. 구는 죽었지만 담의 세상에서 구의 죽음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저 상상 속일 뿐이었다.



구의 시선에서 구는 담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담이 올 줄 알았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꼭 담을 보고 싶었다. 죽는 순간에 오롯이 드는 생각과 감정은 하나. 오로지 담을 보고 싶다는 것. 구가 보는 마지막 세상은 오로지 담이어야 했다.



서두는 그들의 사랑의 종말을 읊는다. 아주 감성적이고 세심한 언어들로 감정을 욱여넣은 채. 그런데 담담하다. 아니, 받아들인 내가 담담해서겠지. 나는 이제 막 그들의 사랑을 접했으니까. 이제부터 시작될 그들의 사랑이 아주 날 선 칼에 난도질당하는 생선 대가리가 된 것 마냥 비참하고, 쓰라리고, 한동안 후유증을 알아야 할 만큼 슬플 줄 몰랐으니까. 



담은 죽은 구의 시신을 씻기고 알코올 솜으로 구석구석 닦은 뒤 정성스럽게 핥다가 어루만지다가 오도독오도독 씹어 먹는다. 사랑 이야기에 어울리지 않는 이 무슨 그로테스크한 일이냐고? 그들에게 사랑이란 그런 거였다. 담에게는 구의 썩어가는 몸을 보는 것보다 그의 살이 완전히 흐물해져버리기 전에 먹어서라도 그를 기억하는 게, 그와 함께하고 싶은 게 사랑이었다.



그들의 사랑은 초등학교 때 시작된다. 구의 짝사랑으로 시작된 괴롭힘은 여느 사랑 이야기의 줄거리 마냥 쌍방의 감정으로 발전한다. 하지만, 틈틈이 그들의 사랑은 방해당하는 데 어렸을 때는 담을 몰래 좋아하던 아이의 질투로 비롯된 따돌림이었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친하게 지내던 노마라는 아이의 죽음이 원인이었다. 그래도 그들의 인연은 맞물린 톱니바퀴마냥 어긋난 순간을 지나쳐 다시 마주친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영원히 이별한다. 톱니바퀴는 시들고 낡아서 두 쪽 중 한 쪽이 먼저 빠져버렸다. 다시는 영영 맞물리지 못할 허공 속으로.



<구의 증명>에는 여러 종류의 죽음이 등장한다. 이 각기 다른 죽음은 담에게서 소중한 사람들을 모두 앗아가 버렸다. 담은 생각한다. 교통사고와 병과 돈, 그런 것이 죽음의 이유가 될 수 있나. 나는 담의 의문에 동조할 수도 답을 할 수도 그 어떤 반응을 할 수도 없다. 그저 글쎄다.라고만 읊을 뿐. 나는 언젠가부터 삶과 죽음에 대해서 자주 생각했다. 그래서 꼭 내가 쓰는 시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죽음을 맞거나 누군가의 죽음을 목도하거나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괴로워했다. 왜 이렇게 어두운 글만 쓰냐는 얘기를 주위에서 종종 들었다. 글쎄다. 근데 <구의 증명>에서 두 사람의 일생을 엿보면서 그냥 담백하게 든 생각인데  죽음이 모든 인간의 끝없이 지독했던 일생의 종말이고, 발자취며, 새로운 시작이라서가 아닐까. 



죽음을 단순히 두렵다고만 생각할 나이는 지난 것 같다. 그래서인지 죽음이 결코 먼 세상 얘기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친구들의 부모님이 돌아가셨으며,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친구의 친구가 자살로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불과 몇 달 전에 나의 가장 가까운 가장 사랑하는 엄마를 잃을까 하는 두려움에, 수술실로 들어서는 엄마를 코로나 때문에 병원에는 가지도 못한 채 며칠을 밤새 끙끙 앓았다. 엄마의 수술이 무사히 끝났고 살아있다는 안도, 그때의 그 감정, 어떤 감정과 바꿀 수 있을까. 



나도 죽음을 자주 생각할 만큼 힘든 적이 있었다. 죽지 않기 위해 병원을 다니고, 상담을 받고, 약을 먹으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는데, 그럼에도 세상을 놓아버리고 싶었던 순간이었다. 그럴 때면 누가 날 기억해 줄까라는 의문이 들었는데. 그래도 내게는 엄마가 있었고, 동생이 있었으며, 몇 안 되지만 소중한 친구들도 있었다. 물론 우울과 불안에 잠식되어 있던 내게 살아가야 할 이유가 남겨진 그들이 겪어야 할 상실감과 괴로움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다시 삶의 의지로 극복해낸다면 돌아갈 곳이,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담에게는 이제 아무도 남지 않았다. 



돈, 그래 돈이 문제다. 나도 돈 때문에 늘 불행했다. 돈이 너무 많아도 문제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많은 건 갈등과 싸움, 시기와 질투로 삶을 망치지만 적은 건 생사의 문제다. 매일 마시는 먹는 물, 쌀, 입는 속옷, 양말 그 어느 것 하나 돈이 아닌 게 없다. 생부터 시작해 사로 가는 매 순간의 고개마다 돈은 필수불가결한 존재다. 돈은 삶이다. 돈은 생명이며, 타당성이며 나아가서는 신으로까지 부를 수도 있겠다. 그래서 난 돈이 무섭다. 돈에게 적어도 휘둘리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구처럼. 그로 인해 구를 잃어버린 담처럼. 그래서 돈을 번다. 그것도 열심히 번다. 적어도 돈으로 아쉬운 소리를 하지는 않아도 되게. 떳떳하게 나 하나 먹고 잘 살 수 있을 만큼. 



결미에서도 담은 묵묵히 구를 먹는다. 울면서 조금씩 조금씩. 구야, 구야 이름을 부르며. 구는 담이 어떤 생각으로 자신을 먹고 있을지를 알아서 마음이 편치 않다. 담이 죽어서 저승이든 어디든 다시 만날 수 있을지 혹은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나 서로를 사랑하게 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구는 자신이 사랑했던 담이 아닌 그 어떤 담도 상상할 수 없고, 사랑할 자신도 없다. 이승에서 담을 사랑했던 기억, 그 기억을 잃고 싶지 않다. 그래서 구가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담이 자신을 기억하며 오래도록 살아주기를 바라는 것. 그런 담을 오래 지켜볼 수 있기를 바라는 것뿐. 그래서 담은 다짐한다. 지구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는 존재가 되기를. 눈물이 앞을 가린다는 게 이럴 때 쓰이라고 만든 말일까. 그들의 사랑은 완전히 끝났다. 하지만 끝나지 않고 여기에 존재한다. 더이상 내게 담담함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먹먹함과 쓰라림은 지독한 두통을 자아냈다. 퉁퉁 부은 눈에서는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가슴. 가슴이 너무 아팠다. 내가 담인 것처럼. 담이라도 된 것처럼. 



[작가의 말]에서 최진영 작가는 한 달 내내 바깥으로 거의 나가지 않고 방구석에 앉아 구와 담의 얘기만 썼다고 한다. 글을 쓰다 지치거나 불행해지면 음악을 들었다고. 어떤 불행을 안고, 얼만큼 슬픔을 눌러 담으며 글을 썼을지 감히 어렴풋이 짐작이 가 작가에게 진심으로 존경을 표한다. 놓칠 것 하나 없던 문장, 의미에 대해 깊이 간직하겠다.

<구의 증명>을 완독한 게 참 서운하고도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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