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오늘도 강한 O을 날립니다.
새 학년이 되고 한 달이 채 안될 무렵, 딸아이는 아침을 먹으며 엄청난 짜증을 쏟아냈습니다.
"아, 진짜 너무 싫은데... 왜 자꾸 나한테 그러는 거야! 처음에는 잘 모르는 애고 하니까 빌려줬는데 이젠 매일 밴드를 빌려달라고 그러잖아요. 어제는 수행평가 보는데 내 거 다 보고 했어요!"
짜증의 대상은 새 학년 첫 짝꿍이었습니다. 첫날부터 손에서 피가 난다고 밴드를 빌려달라고 했는데 그 후로 거의 매일 밴드를 빌려달라고 하더라는 거였습니다. 그리고 펜이며 지우개며 하루에도 몇 번씩 학용품을 빌려달라고 하는데 빌려주기 싫어도 거절을 못하고 빌려줬는데 며칠 전에는 지우개를 망가뜨려 돌려주었다고 했죠. 입이 또 거칠어서 별일 아닌 일에도 욕을 쏟아내서 너무 싫은데 부탁을 다 들어주고 있었죠.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딸아이에게 문제집을 주며 매번 풀어 달라고 해서 풀어줬는데 알고 보니 자기가 해야 할 학원 숙제를 딸아이가 대신한 꼴이었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건 수행평가를 봤는데 제출할 때 보니 자기가 제출한 내용과 똑같았다는 것이었죠. 힐끔거리며 보는 건 느꼈지만 완전 똑같이 베낄 줄 몰랐다나요.
아침 식사 시간이 이 문제로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제가 보기에 아이의 문제는 거절의사를 잘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빌려 주기 싫으면 싫다고 얘기하고 문제집은 네 숙제이니 네가 하라고 얘기를 하고 수행평가는 심증만 있으니 그냥 넘어가라고 말했습니다. 딸아이의 반응은...
"그렇게 싫다고 대놓고 어떻게 얘기해요."
누나의 이 말을 듣고 있던 아들은 "누나, 호랑이 입이구나?" 하고 한마디 했죠.
"호랑이 입?"
바둑을 배우는 아들 녀석 눈에 싫은데도 말 못 하고 상대가 원하는 걸 다 해주는 누나가 호랑이 입(호구)으로 보였겠죠.
"누나, 싫으면 싫다고 해. 당하지만 말고. 나한테 하듯이."
아이는 결국 눈물까지 흘렸고 저와 남편은 걱정이 돼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담임 선생님께 얘기해 보는 걸로 결론을 내리고 식사는 끝났습니다.
남편은 걱정이 되었는지 아이가 하교하기도 전에 전화를 해서는 계속 힘들어하면 어쩌냐며 저를 볶아댔죠.
그날 아이는 등교 후 담임 선생님께 이야기를 드렸고 이야기를 다 들은 선생님은 그 짝꿍의 문제를 이미 다 알고 있으시다며 아이를 앉혀놓고 "싫어!" 연습을 시키셨다고 했습니다. 아이가 교실로 돌아오니 어김없이 짝꿍이 문제집을 내밀며 풀어달라고 했고 아이는 연습한 "싫어."를 겨우 뱉었는데 짝꿍은 대수롭지 않은 듯 앞자리에 앉은 아이에게 문제집을 내밀고 점심시간까지 풀어달라고 했답니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짝꿍은 앞에 앉은 친구에게 문제집을 받아 들고
"야!, 이거 왜 안 풀었어?" 분위기가 험해졌는데 앞에 앉은 친구는
"내가 이걸 왜 풀어? 내가 언제 풀어준다고 했어? 그냥 네가 두고 간 거잖아? 내 숙제도 많은데 내가 왜 네 숙제까지 하냐?" 아이는 그 당당함과 용기가 부러웠던 듯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날밤 딸 방에 웬일인지 아빠와 딸이 한동안 숙덕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그 숙덕거림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아빠, 내가 경기 시작하고 2분 만에 짝꿍 죽였어요."
"오~ 잘했어, 잘했어."
학교 스포츠 클럽 시간에 피구를 하는데 남편은 스포츠라는 틀을 이용해 짝꿍을 아웃시키는 복수를 지시했던 거였습니다.
"순간 얼굴로 던지니까 피하지 못하고 바로 죽더라고요."
두 사람은 저한테 그런 내막을 들키고 한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저는 그건 스포츠정신에 어긋난다고 했고 둘은 "피구는 스포츠예요. 상대를 맞혀야 죽고 그래야 우리가 이긴다고요"라고 항변했습니다. 그렇게 딸아이는 상대편인 짝꿍을 경기 때마다 죽이고 있었죠. 오히려 저는 딸아이 때문에 그 짝꿍이 피구시간을 두려워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딸아이의 반에는 30여 명이 넘는 사춘기 여자 아이들이 있습니다. (남녀공학인데 합반은 아니라...) 사춘기의 예민함과 시기, 질투. 그 사이에서 피어나는 우정과 공감, 때로는 전쟁 같은 싸움이 시시각각 공존하는 혼돈의 공간입니다. 온몸에 가시가 돋친 이 사춘기 여자 아이들이 함께 있다 보면 의도하지 않게 그 가시가 옆 친구를 찌르기도 하고 때로는 의도를 가지고 공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실수든 아니든 어쨌든 가시에 찔리면 아프겠죠. 내 아이든 그 누구든 저는 아이들이 아프지 않게 성장하길 바랍니다. 내 가시로 누군가 아프다면 용서를 구하고 사과할 줄 알고 누군가의 가시로 내가 아프다면 아프다고 말하다 보면 서로서로 자기들의 가시를 좀 더 조심하지 않을까요.
그러다 어젯밤 딸아이가 남편에게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빠, 오늘은 같은 편이었어요. 이젠... 어떻게 해요?"
"음... 흠... 아..."
"으이구~둘다 그만해~!!!"
아이와 함께 사춘기를 겪으며 아이와 나를 이해하는 시간을 글로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