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 과학 이야기
시중에서는 좀처럼 볼 수는 없지만 요즘도 장교 임관식에서 전달되는 것이 임관반지이다. 장교로서의 명예와 자부심이 흘러넘치는 큼직한 반지이다. 혼란스러웠던 중세 유럽에서 각 국가의 왕들이 옥새를 반지화해서 자기의 신분을 나타낸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미국 육군사관학교에서 1835년 졸업 반지(Class ring)를 만들면서 시작된 관례가 우리에도 남은 것이다.
우리나라 국군에서 임관반지는 1954년 4월 15일 졸업한 해군사관학교 8기 사관생도들이 처음 제작(일본에서 만듦)했다고 한다. 육군사관학교는 1955년 11기, 공군사관학교는 1959년 7기 사관생도부터 제작했다. 학군(ROTC)과 3사관학교 그리고 국군간호사관학교는 1기부터 제작했다.
임관반지 가운데에 박아 넣은 보석의 색상은 다섯 가지이다. 육해공군 간호사관학교는 빨간 루비(정열과 용기), 육군3사관학교와 해/공군 학사장교는 파란 사파이어(청순과 성실), ROTC는 녹색 에메랄드(행운과 고귀함), 육군 학사장교는 보라색 자수정(성실과 평화) 육군 간부사관은 검정색 오닉스 보석이다.
군에서 주는 것은 아니고 동기회에서 맞추는 것이라 신청을 안해서 없는 사람도 있다. 진짜 보석에 금으로만 만든 반지면 가보로 물려줘도 좋겠지만, 초임장교의 형편상 그럴 수는 없고 값싼 인조보석이나 자수정 등을 박아 넣고 금도금한 은반지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반지 중에서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절대반지까지는 아니지만, 가장 유명한 것이 교황이 사용하는 '어부의 반지(Ring of Fisherman, 페스카토리오 anulus piscatoris)'가 아닐까 싶다.
'어부의 반지'는 교황이 사용하는 반지 형태로 된 인장으로 사실상 바티칸의 국새이며, 삼중관이나 세디아 제스타토리아(sedia gestatoria, 가마)처럼 교황의 상징물이다. 초대 교황인 베드로가 어부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 후계자인 역대 교황들이 사용하는 인장이 '어부의 반지'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교황과 교회의 '결혼'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 반지는 일반적으로 금으로 만들고, 인면(印面)에는 배에 탄 베드로가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낚는 모습과 반지의 소유자인 당대 교황의 라틴어 이름을 새긴다. 마태복음 4장 19절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라는 구절을 표현한 것이다.
어부의 반지의 역사가 문서상으로 확인된 것은 클레멘스 4세(Papa Clemente IV, 재위: 1265~ 1268)가 그의 조카에게 보낸 편지에 어부의 반지에 대한 언급한 것이다.
원래는 인장으로 사용하고자 제작한 것이어서 교황이 공식문서에 녹여서 물러진 실링 왁스에 어부의 반지를 찍어 그 문양을 남기는 방법으로 사용했다. 당시에 교황이 직접 작성, 서명한 문서들은 교황이 직접 어부의 반지로 봉했으며, 그 밖의 다른 바티칸 공문서들은 특수 도장을 사용하여 납으로 봉인했다고 한다. 1842년까지 교황의 문서를 봉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 이후에는 똑같은 모양의 도장에 붉은 잉크로 찍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교황이 사망하면 교황 궁무처장(Camerlengo)을 맡은 추기경이 반지와 납봉 인장을 파기하는데, 이때 반지를 은망치로 파괴하고 파편을 교황의 관에 함께 매장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낭설이라고 한다. 교황이 숨을 거두면 궁무처장이 반지를 교황의 손가락에서 빼내고는 추기경들이 참관한 자리에서 간단한 의례를 행한 뒤 어부의 반지에 십자 모양으로 깊은 흠집 2줄을 내어 망가트린다. 이는 사망한 교황의 치세가 끝났음을 상징하며, 신임 교황이 선출되기 전까지 사망한 교황의 이름으로 문서가 위조 날인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한 것이다.
이 과정은 영국의 소설가 로버트 해리스(Robert Harris)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콘클라베 Conclave>(2024)에 잘 묘사되어 있다. 이 영화에서 토머스 로런스 추기경 역을 맡아 호연한 랄프 파인즈(Ralph Fiennes, 1962~)는 제97회(2025)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석연치 않은 이유로 아깝게 놓쳤다.
베네딕토 16세가 2013년 2월 28일 자로 퇴위하면서, 그의 어부의 반지도 함께 효력을 말소됐다. 그리고 동년 3월 13일 선출된 후임 프란치스코 교황은 베네딕토 16세와 디자인은 같되 이름만 다르게 새긴 어부의 반지를 사용했다. 이전까지는 금반지를 사용했으나, 검소함을 강조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금도금한 은반지를 사용했다고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 후 공개석상에서 어부의 반지에 입을 맞추려는 신도들에게서 손을 빼는 모습을 자주 보여 구설수에 올랐다. 평소 소박한 모습을 보이며 근검절약을 강조하던 프란치스코 교황에게는 이러한 관습이 불편하게 느껴진 것으로 보인다.
교황들은 선출되고 이름을 정한 후 자신만의 어부의 반지를 받는다. 콘클라베에서 선출된 신임 교황이 교황명을 선택하면 그에 따라 새 반지를 제작하고, 즉위 미사 때 교황의 오른쪽 약지에 끼워준다.
5월 7일부터 시작되는 콘클라베를 위해 시스티나 성단 지붕에 굴뚝이 설치 됐다고 한다. 세간의 돌아다니는 이야기는 교황은 몸매가 풍성한 교황 다음에는 날씬한 사람이 교황이 되고 그다음은 다시 풍성한 교황이 된다고 한다. 누가 될지도 점쳐보는데 재미난 관전 포인트이다.
금값이 전래 없는 상승행진을 하고 있다. 기존 사이즈와 동일하게 하더라도 예전보다 수십여 배의 금액이 소요될 것이다. 다음 교황이 선출되면 어떤 재질과 디자인의 어부의 반지가 나올지 궁금해진다. 교황청도 고민하고 있을 테니 결과를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전영식, 과학 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