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내 화단에 눈에 띄는 예쁜 꽃이 있었다. 한참을 웅크리고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을 무시하고 꽃만 봤다. 그놈 참 깔끔하구먼... 저런 색의 도라지꽃을 좋아하니 눈이 안 갈 수 없네. 그런데 저게 무슨 꽃일까? 원예를 전공하는 지인에게 사진을 보냈더니 바로 답이 왔다.
- 북반구의 초원, 습지 등에 널리 분포하며 깊은 산 양지쪽 계곡이나 높은 산 정상 부근 초원에서 자람.
- 발톱 모양의 꽃뿔이 특징
- 대략 60~70개 종을 보유하고 있음. 북한에서는 천연기념물로 지정.
- 하늘매발톱은 높은 산의 석회암 지대에서 자란다고 한다.
- 꽃잎과 꽃받침이 각각 다섯 장으로 꽃받침은 파란색, 보라색, 자색(purple) 등 다양
여기서부터 무언가가 시작되겠다 싶었다. 예쁜 꽃, 좋은 인연이다.
매발톱꽃, ⓒ 전영식
집 앞 화단가에 매발톱꽃이 있었고 지금은 활짝 피었다. 주로 6~7월에 피는데 빠른 경우 5월 말부터 핀단다. 그런데 4월 말에 벌써 피었으니 칭찬해 줄 일이다. 하지만 스스로가 모든 기록을 경신하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다. 인터넷도 식물도감도 그리고 우리의 기억도 말이다. 매발톱꽃은 처음에 아래를 보고 피어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고개를 들어 하늘을 향하게 되고, 이내 꽃잎을 하나하나 떨구면서 져 간 후 씨방을 감싼 꽃대만 하늘을 향해 남게 된다고 한다.
특이한 꽃이름에 얽힌 사연
아름다운 꽃이름 치고는 특이하게 무시무시한 ‘매발톱’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는 꽃잎 뒤쪽에 있는 ‘꽃뿔’이라고 하는 긴 꿀주머니가 매의 발톱처럼 안쪽으로 굽은 모양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러한 꿀주머니 형태는 제비꽃이나 물봉선화 등에서도 볼 수 있다. 이 꽃의 라틴명인 아퀼레기아(Aquilegia)나 서양에서 일반적으로 부르는 콜럼바인(columbine)이라는 이름 역시 모두 꽃의 뿔 모양을 보고 붙여졌다. 도대체 꽃뿔이 어떻게 생겼길래 저런 이름이 붙었을까?
매발톱꽃, ⓒ 전영식
아퀼레기아(Aquilegia)는 ‘독수리 같은’이라는 뜻의 아퀼눔(aquilnum)이라는 라틴어에서 왔다고 한다. 다른 주장에 따르면 물을 뜻하는 aqua와 모으다라는 legere의 합성어라는 이야기도 있다. 꽃뿔이 마치 바이킹 술잔같이 생겨 물을 담을 수 있다고 해서라는데, 꽃뿔의 크기가 작아 믿음직스러운 설명은 아니다.
‘콜럼바인’이라는 말은 비둘기라는 뜻의 라틴어인 ‘콜룸바(columba)’로부터 왔는데, 역시 꽃뿔이 비둘기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같은 꽃을 ‘매의 발톱’이나 ‘독수리’처럼 생겼다고 보기도 하고, 정반대의 이미지를 지닌 비둘기로 보기도 하였다니 세상에는 진실은 없고 느낌만 존재하는 게 분명해 보인다...
종간교잡이 잘되는 매발톱꽃
게다가 중국에서는 매발톱꽃이 서로 종이 다름에도 자기들끼리 수정이 잘 이뤄지므로(종간잡종, 種間雜種, hybrid) ‘매춘화(賣春花)’, 이른바 바람둥이꽃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름이 모양에 비해 평가절하된 기분인데, 이것도 왕서방 마음대로니 어쩔 수 없다. 서양 일부에서는 피에로의 모자를 닮았다고 해서 '피에로의 달'이라고도 부른다.
잡종(Hybrid)은 우리가 자동차에서 많이 보는 단어인데 이는 엔진+전기모터로 구동되는 자동차를 말하지만, 생물학에서는 서로 다른 계통 간에 교배로 태어난 동물이나 식물을 의미한다. 같은 속에 속하는 다른 종 사이의 잡종을 종간잡종, 같은 종내 다른 아종 사이의 잡종을 종내잡종이라고 한다.
매발톱꽃, ⓒ 전영식
아퀼레리아 속의 식물은 종간잡종(種間雜種)이 잘되기 때문에 육종가들이 아름답고 화려한 품종들을 많이 육성했다. 이 교잡품종들이 봄 화단이나 분화로 흔히 볼 수 있는 꽃이 매발톱꽃 종류들이다. 예쁘지만 자연스럽지는 않다고 할까? 하긴 우리도 네안데르탈인(비만, 당뇨, 탈모의 유전자 기원)과 호모 사피엔스 간의 혼혈이란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니 순종을 찾기 힘든, 잡종이 지배하는 세상일지도 모른다. 이미 우리 식탁에 올라오는 식물은 90%가 하이브리드이다.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도메니코 기를란다요(1449~1494), 15세기, 패널에 유채, 171x165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콜럼바인(Columbine)'은 ‘작은 비둘기’ 또는 ‘비둘기처럼 생긴’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매발톱을 성령을 상징하는 꽃으로 여긴다고 한다. 매발톱에 얽힌 종교적인 이야기도 있다.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은 사촌이다.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 마리아에게 나타나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할 거라고 알려준다(수태고지). 이때, 다 늙도록 임신을 못했던 엘리사벳이 세례 요한을 임신한 사실도 함께 알려준다. 성모 마리아는 자신도 임신한 상태이면서 엘리사벳을 시중 들러 엘리사벳의 집으로 나선다(누가복음 1장). 성모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집을 향해 내디딘 발자국마다 매발톱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매발톱꽃을 '성모의 신발(슬리퍼)'라고 부른다.
매발톱꽃은 문화권에 따라 각기 다른 상징성을 가져 명성을 누려 왔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이 꽃을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상징으로 여겼다. 켈트 문화권에서는 꿈과 환시의 세계와 이 세상을 이어 주는 정문으로 보았다. 또 유럽에서는 왕궁이나 귀족의 궁성에서 재주를 부리는 어릿광대의 모자로, 오스트리아에서는 ‘한 군데 모여 있는 다섯 마리 새(비둘기)’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런가 하면, 매발톱꽃은 그리스도교에서도 아래로 피는 꽃송이마다 꽃뿔 다섯 개가 솟는 특이한 생김새 때문에 상징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아옹다옹 달린 꽃송이들에서 저마다 솟아오른 꽃뿔을 보면서 한데 모여 앉은 비둘기들을 연상했는데, 이를 성령을 상징하는 꽃이라 여기게 되었다. 또 매발톱꽃 일곱 송이 묶음을 보면서는 성령의 일곱 은혜를, 세 송이 묶음은 신, 망, 애 삼덕을 가리킨다고 간주했다. 그리고 이 식물의 잎이 세 갈래로 갈라진 것을 삼위일체를 나타낸다고 보았다. 또한 이 꽃의 색깔인 파란색(혹은 보라색)은 수난과 참회를, 노란색은 빛과 활기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했다.
종교화를 그린 중세기의 미술 작품 중에, 매발톱꽃은 그리스도의 꽃으로, 곧 구원의 역사에서 괴롭고 고통스러운 중에도 기쁘고 의미 있었던 예수의 활동의 상징으로 종종 등장한다. 가령 성모 영보(수태고지), 그리스도의 강생, 탄생, 목자들과 동방 박사들의 아기 예수 경배, 성가족의 이집트 피신, 성모과 아기 예수, 예수의 수난과 부활 등의 장면에 이 꽃이 종종 등장한다. 그런데 이 꽃이 배치되는 자리가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대개는 화폭의 귀퉁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휴고 판 데르 후스의 포티나리 제단화 중 <성탄>, 아래쪽에 일곱 송이의 매발톱꽃이 있다. 1476, 목판에 유채 물감, 253x586cm,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위 그림은 부유한 이탈리아 사업가이며 브뤼주의 메디치 가문 대리인이었던 토마소 포티나리가 피렌체에 있는 가족 예배당에 걸기 위해 플랑드르에서 활약했던 휴고 판 데르 후스(Hugo van der Goes·약 1440~1482)에게 주문한 제단화이다. 세 폭의 그림 중 중앙 패널이다.
그림에서는 마리아, 요셉, 천사들과 양치기들이 가운데 (땅바닥에) 있는 아기 예수를 둘러싸 경배하고 있다. 다른 성탄 그림과는 달리 등장인물들은 엄숙하고 무거워 보인다. 크기가 서로 다르게 그려진 인물들은 판타지 영화스럽기도 하다. 바닥에 홀로 놓여 있는 아기 예수는 앞으로의 희생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에는 복잡한 상징물들이 등장한다. 빨간 백합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세 송이의 카네이션은 삼위일체, 일곱 송이의 콜롬바인 꽃(매발톱꽃)은 마리아의 일곱 가지 슬픔을 상징하며, 밀 다발은 베들레헴을, 그리고 배경의 건물 문에 새겨진 다윗을 상징하는 하프는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임을 시사한다고 한다.
여러분이 보시기에는 이렇게 예쁜 매발톱꽃이 어떻게 보이나요? 모양에서 나타나는 사물과의 유사성, 중세 그리스도교의 상징, 혼동스러운 하이브리드의 생물... 정답은 없고 우리가 느끼고 보는 게 정답입니다. 이렇게 중의 적인 것들이 우리 주변을 구성하고, 그것이 나이고 우리입니다.
참고문헌
1. 김영나의 서양미술산책, 휴모 판 데르 후스의 '성탄', 조선일보, 2010.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