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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혜 Apr 09. 2024

삽질 찬양

내 닉네임 제니앤은 Jenny& 이다. 

내 영어 이름 Jenny 에 &이 붙었다. 

&에서 닉네임이 끝난 이유는 & 다음에 무엇이든 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남겨두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때 내 블로그의 이름이 Jenny & anything 이기도 했다. 

그런데 Jenny& 을 들여다 보는데,

내가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하면서, 결국 그 무엇도 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어젯밤 아이들에게 『샘과 데이브가 땅을 팠어요』라는 그림책을 읽어주게 되었다.


샘과 데이브는 월요일에 뜬금없이 땅을 파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하게 멋진 것" 을 찾아내겠다는 목표로 계속 땅을 파 내려간다.

한참을 파도 어마어마한 것은 없다. 

샘과 데이브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본다.

너무 밑으로만 팠나봐, 옆으로 파 보자.

둘이니까 서로 다른 방향으로 파 보자. 

이 길이 아닌가벼, 다시 아래로 파자. 



열심히 팠지만, 그들은 결국 핑크 다이아몬드를 발견하지 못하고 지쳐 잠이 든다. 

샘! 데이브!

처음에 시작했던 그 한 길로 조금만 더 파면 돼. 

강아지가 핑크 다이아몬드가 어디 있는지 힌트를 주잖아. 

딴 길로 새지 말고, 그 길을 쭉 파라니까. 

이들을 보며 안타까운 심정으로 외쳐 댔다. 

그러다 급 현타.

나도 이러고 있는 거 아냐?

이 길로 가다보면 대단한 사람이 될 거야, 하고 조금 가다가

아, 이 길이 아닌가, 그럼 저 길로 가보자, 하다가

아, 또 아닌가벼, 오 저기도 괜찮군.

가능성이라는 희망 아래 여기저기 기웃대다가 결국 나는 헤매기만 하고 지치기만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뭔가 열심히 하는데, 성취가 나오는 수량까지 가지 못하고, 효율성을 추구한다는 명목 하에 너무 빨리 그만둬 버리는 게 아닌가. 

흠. 

Jenny& 이라니 이런 바보 같은 이름이 또 있나. 




그래서 샘과 데이브는 푹 자고 일어나서 집에 들어가 초콜릿 우유와 과자를 먹는다. 

비록 핑크 다이아몬드는 찾지 못했지만,

땅을 팠던 그 경험이 바로 "어마어마하게 멋진 것" 이었다고 얘기하면서. 





제니앤이 삽질을 멈추지 못하는 나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닉네임일지라도,

뭐 어때. 

삽질 자체가 어마어마하게 멋진 것일 수도 있지. 

핑크 다이아몬드,

내가 가졌으면 더 좋았겠지만, 

못 가져도 뭐. 

나는 지금 안락한 집에서 초콜릿 우유와 과자를 먹을 수 있잖아. 

좋은데?

한 우물을 파지 못하는 나에 대해 반성하려다가, 대단한 자기합리화로 끝났군.

이것도 좋지. 

그래서 닉네임은 계속 제니앤인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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