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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라 Jul 21. 2022

서문

영문학과 전공 수업에서는 리스폰스 페이퍼(response paper)라는 이름의 과제가 늘 등장했습니다. 다음 시간에 논의할 작품을 미리 읽고 작품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한 두 페이지의 짧은 글로 쓰는 과제였죠. 독후감이나 리뷰(review)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이 과제를 리스폰스 페이퍼, 즉 ‘대답하는 글’이라 부르는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작품은 질문하고, 우리는 대답합니다. 이 행위가 세계를 대하는 나의 태도로 이어져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세계는 질문합니다. 그리고 대답하는 것은 의무(responsibility)예요. 귀찮고 어려워도 과제를 해야 하는 것처럼, 세계에 대답하지 않는 것은 책임을 회피하는 것일 테죠. 그것이 나와 동떨어진 문제로 보일지라도 응답하고, 설명하고, 책임지는 연습. 그것이 그 과제의 본질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2022년까지 살아남은 20대 여성 청년에게 세계는 끝을 향해 내달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나는 정말이지 이번 생은 망한 것 같습니다. 내게 세계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되뇌지만 역시 억울합니다. 책임이 있다면 타자를 외면하고 죽여온 기성세대와 가부장제에 있을 것입니다. 생존을 고민하고 밤길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이 세계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강요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다만 내가 계속해서 ‘응답하라’는 목소리를 듣는 것은, 앞서 응답해온 사람들을 보고 자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타자의 위치에 대해 숙고하고, 이들의 목소리를 어떻게 듣고 재현할지 고민하며, 끝내 그것을 아름다운 글과 그림으로 엮어내는 사람들. 나는 운 좋게도 여성 작가들이 웹툰을 통해 윤리와 평등을 이야기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세상에 나의 말풍선을 더할 수 있었습니다.


그림은 시선을 사로잡고 글은 마음을 후벼 팝니다. 후벼 파인 공간에는 새로운 질문과 새로운 답들이 채워집니다. 이미지 속에서 나는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나와 비슷한 신체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 세상에 나름의 방법으로 응답하는 캐릭터들을 봅니다. 한국의 여성 작가들은 한국 사회에 응답하고 있습니다. 대답하는 일은 도망치지 않아야 가능합니다. 그들은 도망치지 않았고, 글과 그림을 통해 독자들과 연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자애들이 믿고 자라날 수 있는 어떤 마음을 내밉니다. “순리대로, 이치에 맞게, 마땅히 그리 되어야 하는대로… 사리에 맞게, 바르게 가야 하는 대로… 온당하게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 […] 순수!” 세상은 망했다고 절망하더라도 이내 무언가 다시 믿을 수 있는 힘. “싸우는 사람에게는 순수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웹툰 작가들은 그것을 글뿐만 아니라 그림으로도 전달하고 있으니,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아주 가까이 있는 셈이지요. 읽고 보고 믿으면, “세상이 얼마나 멋지게 뒤집어지겠어요! 여자애들이 좋은 걸 믿고 자라면!” (고사리박사, <극락왕생> 11화).


나는 웹툰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웹툰에 대해 무언가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대학원생이 되었습니다. 무엇이 나를 만화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을까. 내가 여러 차례 정주행한 작품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을까. 작가들은 ‘망했다’ 싶은 세상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고, 그들의 작품에 나는 무어라 응답할 수 있을까. 이런 물음들에 답하기 위해 지금껏 사랑했던 작품들에 대해 정리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물론, “인간은 남의 이야기에서 멋대로 자신을 읽어내는 법”입니다 (뼈와피와살, <합법해적 파르페> 75화). 그래서 이 기록들은 어쩌면 오독(誤讀)의 릴레이, 과도한 의미 부여의 타래일 수 있겠습니다. 그래도 나는 사람들이 “바람에 백 번 쓰러지더라도 세상의 당연함에 몸을 맡기지 않았으면 좋겠”고 (뼈와피와살, 99화), 그럴 수 있는 힘을 웹툰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으며, 작품들에 대해 논하고 함께 이야기할 장소가 필요하다 느낍니다. “냉소에 나이 제한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더는 나와 세상을 분리해서 도망칠 기한은 지났다는 사인이 언젠가부터 머리 속에 반짝”이고 있으므로 (함세정, "'노답'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기").

<합법해적 파르페> 99화.


고사리박사, <극락왕생> 11화 “산할머니,” 카카오웹툰, 42화. 2022년 1월 7일.

https://webtoon.kakao.com/viewer/%EA%B7%B9%EB%9D%BD%EC%99%95%EC%83%9D-042/152413.

함세정, “’노답’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기” <여성신문> 세상읽기, 2020년 8월 30일, 수정 2021년 1월 5일. http://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1768,

뼈와피와살, <합법해적 파르페> 75화 “어떤 좌절,” 2020년 12월 31일.  

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titleId=729036&no=75&weekday=fri.

---. <합법해적 파르페> 99화 “납작 엎드린 사랑이여,” 2021년 11월11일.  https://comic.naver.com/webtoon/detail?titleId=729036&no=100&weekday=f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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