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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이 Sep 06. 2023

38. 적극적으로 세상에 부딪힌다는 것 2

그릇의 차이

#20230906 #그릇의차이 #적극적으로세상을사는것


 J와 나는 다른 점이 많다. 그중 하나가 밥 먹을 때 앞접시를 쓰는 스타일이다. 나는 앞접시라고 해도 많이 안 묻히고 쓰는 편이다. 음식도 조심스럽게 던다. J는 나보다 터프하다. 보통 음식을 나한테 먼저 덜어주는데, 그릇에 얼마나 묻든 턱 하고 준다. 그러면 자연스레 접시 여기저기에 묻는다. 처음에는 그게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은 그냥 그러려니 한다. 앞접시는 원래 그런 용도니까.


 내가 다니는 절에서는 공양을 뷔페처럼 한다. 넓적한 그릇에 자기가 먹을 만큼 덜어서 먹는 형식이다. 다 먹고 나서는 그릇을 물티슈로 닦는다. 수질오염 때문이다. 절 동생 W는 먹고 나서 닦는 게 귀찮아서 그릇 한 귀퉁이에 밥을 조금만 담아서 먹고 만다. 밥을 적게 받으면 그릇에 많이 묻지 않아서 닦을 것도 적다.


 내가 세상을 사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 엉덩이가 무거워 쉽사리 몸을 움직이지 않는 나는, 익숙한 걸 좋아하고 새로운 일에 덤비는 걸 꺼린다. 어느 정도 루틴이 잡히고 나면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새로운 루틴이 끼어들기 쉽지 않다. 글을 쓰는 것도 내가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뭔가를 한다는 위안일지도 모르는데, 뭘 더 해야 할지 몰라서 이렇게 지내고 있다. 이는 마치 앞접시에서 음식이 묻은 부분만 계속해서 쓰는 것과 비슷하다.




 인스타그램 릴스를 보다가 개그우먼 조혜련이 선풍기 앞에서 짜장면 먹는 것을 보았다.* 짜장면이 선풍기 바람에 날려 얼굴에 막 묻었다. ‘추잡스럽게 먹네.’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근데 조혜련이라고 저렇게 먹고 싶었을까? 방송이니까 사람들을 웃기기 위해서 자기 한 몸 던진 거다. 그런 생각에 미치니까 대단하다 싶었다. 자신의 몸도 사람들을 위한 도구라고 생각하면 집착할 것이 아닌 것을, 나는 깨끗해야 한다는 생각에 갇혀있었구나. 단편적인 것만 보고 판단했구나. 그렇다면 내 역할은 그걸 보고 불편해할 게 아니라, 그냥 편하게 웃으면 되는 거였구나. 웃기려고 한 거니까.

출처: MBC 안하던 짓을 하고 그래


 이어서 개그우먼 박나래가 원더 우먼 페스티벌에서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자신은 개그우먼, 여자, 디제잉 등 많은 박나래가 있으니, 개그우먼으로서 무대 위에서 남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고 까이는 것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페르소나의 구분이 잘 되어있다 싶었다. 그게 그녀의 자존감의 원천일지도?

출처: 2018 원더 우먼 페스티벌
출처: MBC 나 혼자 산다 / 근데 이런 모습까지 보고 싶지는 않았어요, 누님.***


 이산혜연선사(怡山惠然禪師) 발원문(發願文)에는 ‘모진 질병 돌 적에는 약풀 되어 치료하고, 흉년 드는 세상에는 쌀이 되어 구제하되, 여러 중생 이익한 일 한 가진들 빼 오리까****’라는 구절이 있다. 중생에게 이익되는 일이라면 뭐든 주저하지 않는 보살의 자세가 담겨있다. 사람들을 웃기겠다는 마음으로 자신의 몸을 던지는 사람들을, 나는 겉모습만 보고 가볍게 생각했으니. 겉이 아니라 속을 보는 것은 얼마나 마음이 깨끗해야 가능할 일일는지!




 J는 해야 하는 일이 있으면 그냥 한다. 어떻게 접근하고 어떤 식으로 풀어가고 생각하고 재고 따지는 데에 매몰되지 않고 그냥 일단 덤빈다. 나는 이리저리 생각만 하느라 행동으로 옮기는 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는데. 내가 “나는 원래 그래.”라고 하면 J는 “원래 그런 게 어디 있어? 닥치면 그냥 하는 거지.”라고 한다. 나는 J의 그런 부분이 너무 부럽다. 겁도 없는 거 같고. 반야심경의 ‘무유공포無有恐怖’(6. 이사를 하며)가 떠오른다. 무슨 일이든 일단 부딪힌다는 게 나로서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인데, J는 한다. 그리고 결국 해낸다. 그게 J와 나의 그릇의 차이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 앞접시의 하얀 부분에 과감하게 음식을 놓는 것. 하얀 천에 과감하게 물감을 칠하는 것. 자신의 색깔로 물들여가는 것. 앞접시도, 내 몸도 다 세상을 위한 방편일 뿐이다. 생각을 덜 하고,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서 세상에 부딪히는 연습을 해야겠다.



* https://youtu.be/muLF2f3P190?si=kQWzr9jDlz7DuvwZ 

** https://youtu.be/g2C4zozPAW0?si=VWeaYLS9WrO0OKP5 

*** https://youtu.be/JVEGSPpoP2I?si=QTwSylnxv89mZhLC 

**** 疾疫世而現爲藥草 求療沈疴(질열세이현위약초 구료침아)

饑饉時而化作稻梁 濟諸貧餒(기근시이화작도량 제제빈뇌)

但有利益 無不興崇(단유이익 무불흥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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