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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이 Sep 27. 2023

40. 살리느냐 죽이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불응주촉생심(不應住觸生心), 탁마(琢磨) 

#20230927 #머무름 #불응주촉생심(不應住生心)* #탁마(琢磨)


 부대가 산에 있어서 그런가, 숙소 복도에 종종 말벌이 있다. 어디서 들어온 거지? 윙윙거리면서 날아다니면 크기도 엄지손가락만 한 게 쏘일까 봐 무섭다. 벌의 날갯짓에 바람도 느껴지는 거 같다. 감히 내보낼 생각도 못 하고 피해 다닌다. 이 친구들은 복도를 이리저리 쏘다니면서 창문에 부딪히다가 결국은 기운이 빠져 죽고 만다. 그런 아이들이 복도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으면 별로 보기에 좋지 않다. 땅에 떨어진 시체들을 못 본 척하다가, 날 잡고 빗자루로 쓸어서 한데 모아 두었다. 복도가 깔끔해지니 기분이 좋았다. 




 어느 날 다목적실에 전자레인지를 쓰러 갔는데, 벌 한 마리가 날개를 한쪽을 다쳤는지 바닥에서 윙윙거리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과연 이 친구를 주워서 밖에 풀어주는 것이 더 나을까, 아니면 더 고통스럽지 않게 바로 죽이는 것이 나을까? 


 밖에 풀어준다고 해도 얘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살 수는 있을까? 개미들의 먹이나 되지는 않을까? 얘도 괴로움을 느낄까? 자살이라는 개념은 있을까? 내가 자기를 죽이면 과연 고마워할까 아니면 원망할까? 내가 뭐라고 이 친구의 운명을 이래저래 결정하려고 하나? 


 죽이려고 밟으려 해도 파삭하고 벌의 몸이 부서지는 느낌이 몸서리치게 싫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빗자루로 내리치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내 발, 내 손으로 한 생명을 부수는 느낌이 오래도록 남을 것 같았다. 고통을 길게 하기보다는 한 번에 끊어주는 게 나을 것 같아 빗자루로 내리쳤는데 잘 맞지도 않고, 빗맞히니 오히려 고통의 시간을 더 길게 하는 것 같아 주저하게 되었다. 내리치는 손에 힘이 빠졌다. 상대를 생각해서 죽인다는 것도 감히 아무나 할 게 아니다 싶었다. 그래서 감히 죽이지도 못하고 살리지도 못하고 그냥 내버려 둔 채 방에 들어왔다. 나는 아직 감히 그럴 단계가 아니라고 합리화하면서, 생각만 잔뜩 짊어진 채로. 


 몇 시간 뒤에 다시 보니 가만히 있기에 죽었구나 싶었다. 더 빨리 편하게 해줄 걸 그랬나? 나중에 생각해보니, 내 몸에 남을 감각에도 (내 마음이) 머무르지 않아야 했다. 그 감각이 남는 게 두려워서 괴로워하는 벌을 더 빨리 편하게 해주지 못했구나. 만약 벌을 죽였다면 그 업(業)도, 벌의 원망도 나한테 쌓이겠지만, 그만큼 나는 더 세상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어차피 업도 원망도 나도 벌도 다 공(空)하고, 거기에 매이지 않아야 하니까. 


 내가 이 벌을 죽이려고 했던 것도, 벌이 이렇게 다친 채로 건물 안에 갇혀서는 세상을 위해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죽고 더 높은 인식(認識)을 가진 존재로 태어나서 세상을 위했으면 한다는 마음이었는데, 근데 내가 뭐라고 그렇게 하나? 건물에 갇힌 벌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었을까? 벌의 역할은 꽃가루를 나르고, 먹이사슬 내에서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것인데, 다친 벌의 역할은 건물에 사는 벌레들에게 먹이가 되는 것? 글쎄다. 근데 이런 것들을 아무리 생각해봤자 다 내 인식으로 생각하는 것인걸. 나는 내 인식보다 높고 넓고 깊은 것들을 생각할 수 없다. 깨달아서 다 알면, 이 벌이 어떤 인연(因緣)으로 벌로 태어났고, 앞으로 어떻게 되고 하는 것들을 다 알면 그렇게 해도 되지, 근데 나는 모르니까 함부로 남의 생명을 끊을 생각을 해서도 안 되겠다. 모기나 날파리는 아무 생각 없이 잡으면서, 벌은 크기가 크니까 괜한 망념(妄念)도 그만큼 커졌다. 




 문득 금강저(金剛杵)가 생각났다. 중생들의 망식(妄識), 인식(印識)을 깨부수는 금강저. 중생들의 마음의 벽을 허무는 범종 소리. 탁마(琢磨)도 떠올랐다. 탁마는 상대방이 자기도 모르게 걸려 있는 마음/생각을, 정말 그 사람을 위해서 일깨워주는 것이다. 근데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일깨워줄 수는 없다. 상대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탁마는 상대를 위한 게 아니라 내 만족일 뿐이니까. 남의 마음/생각 틀을 깨려는 것도 벌의 몸을 짓밟는 것과 같이 생각을 많이 하고 조심해야 하는 게 아닐까? 벌의 몸이 부서지는 감각에 매이지 않고 흘려보내야 했던 것처럼, ‘그 사람이 거기에 매여 있었다’, ‘내가 그걸 깨 주었다’라는 생각에 머물러서도 안 되겠지만 말이다. 



* 금강경 사구게 中 제2게송 

不應住色生心(불응주색생심) 형상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고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소리, 냄새, 맛, 닿음, 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도 말며 

應無所住而生基心(응무소주이생기심) 마땅히 아무 데에도 머무름 없이 마음을 낼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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