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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이 Apr 27. 2022

불교와 정신과학

성장 vs 만족 두 번째 이야기

#20220427 #불교 #정신과학 #할수있는만큼


 불교는 내가 ‘더 나은 내’가 되길 꿈꾸게 한다. 정신과학은 내가 ‘지금의 나’를 더 수월하게 받아들이도록 돕는다. ‘더 나은 나’와 ‘지금의 나’ 각각은 「성장 중독」에서의 두 삶의 태도, 성장만족에 해당하겠다. 이 둘은 양립할 수 있을까? 뭔가 둘이 상충되지 않나? 그런데 두 학문을 모두 배우고 있는 나는, ‘더 나은 나’를 추구하다가 그러지 못해 괴로울 때 정신과학(or 심리학)적인 방법으로 ‘지금의 나’를 받아들이고, 다시 ‘더 나은 내’가 되고자 함을 반복한다면, 결국 괴로운 때가 없어야 하는 게 아닌가? 아쉽게도 현실은 그러지 못하다.


 국시를 공부하는 틈틈이 만화 「원펀맨」을 보았다. (원펀맨을 보는 틈틈이 공부한 걸지도) 어느 전투에서 악당(가로우)에게 진 히어로(쿠로비카리)가 자신은 그저 자신의 강함에 취해 있었을 뿐이며 기분 좋은 승리만을 원했다고 좌절하고 있는데, 다른 히어로(아마이 마스크)가 (약한) 자신의 한심함에 화가 나지 않냐고 화냈다. 그리고 다른 히어로(탱글탱글 프리즈너)도 쿠로비카리에게 자신을 지켜내라고 한다. 아마이도 ‘너의 근육이 자신을 극복해온 증거니까, 약한 자신을 용서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자신도 몇 번이나 자신에게 좌절하고 실망하든 일어서서 앞으로 갔다고 했다. 더 나은 자신이 되라는 의미였다.

원펀맨 리메이크 180화, 읽는 순서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23.03.18 추가; 절에서 부처님을 모신 곳을 대웅전(大雄殿)이라고 한다. 대웅(大雄)은 위대한 영웅이란 뜻으로, 부처님의 별칭이다.* 대보적경 24권에는 부처님을 '지혜와 복을 두루 갖추신 최상의 높은 이'라 표현하고 있다.**)


 만화의 다른 부분에서는, 전쟁의 규모가 너무 커진 탓에 자신들이 뭘 할 수 있겠냐고 좌절하는 다른 히어로들이 나온다. 그러자 컨트롤타워 역의 간부가 나와서는 “주어진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거 외에 뭐가 있냐”라고 한다. “돌은 돌이면 되고, 다이아몬드는 다이아몬드면 된다. 적절한 곳에서 적절한 일을 하면 무엇이든 진정한 보석이 되는 거다.” 자신을 받아들이고, 그 역할을 다하는 것.

원펀맨 리메이크 184화, 읽는 순서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만화 「나루토」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동생을 지키기 위해 탈주 닌자가 되었던 우치하 이타치가 자신과 비슷한 삶을 살아온 카부토에게 이런 말을 한다. “자신을 안다는 건 자신이 무얼 할 수 있고 무얼 못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 자신이 할 수 없다는 걸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 해낼 수 없기 때문에 그걸 보완해주는 동료가 있는 것이다. 본인이 원래 할 수 있는 일을 과소평가하지 않기 위해서도 말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하는 것.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나루토 582화 이타치와 카부토의 대화, 읽는 순서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몇 달 전 TV조선 [국민가수]에서 누군가가 부른 임재범의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들었다. 임재범이 기독교 신자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노래도 있는 줄은 몰랐다. <비상>에서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혼자가 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든 발버둥 치는 듯한 간절함과 외로움이 느껴졌다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에서는 ‘너’의 존재를, 함께함을 인정하고, 함께 현실을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고 받아들이는 듯했다. 전자에서는 크게 흔들리고 불안불안한 느낌이 든다면, 후자에서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느낌을 받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어디쯤이 적절한 균형일까? 만족하기만 하면 발전이 없고, 이상을 좇으면 현실이 따라가지 못해 괴롭다.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면서도 자신의 상태에 실망하지 않고 스스로를 다치지 않게 하는 방법. 며칠을 고민했지만 답은 결국 이거였다.

할 수 있는 만큼

할 수 있는 만큼 나아가고, 할 수 있는 만큼 머무르고. 만족하다가 불안하면 다시 할 수 있는 만큼 노력하고. 기준은? 나를 갉아먹지 않는 선에서. 쉬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는 확실하게 쉬기. 그런 자신을 비난하지 말기. 용서하기. 받아들이기.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과소평가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우선 나와 많이 친해야겠다. 그래야 채찍질만 하지 않고 쓰다듬어줄 수 있을 테니까.


 수행도 마찬가지. 남을 위하는 것도 할 수 있는 만큼. 나를 포기하면서까지 하는 건 아직 너무 어려운 이야기. 그렇게 하려는 마음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그런 준비가 되지 않고서 그렇게 덤비는 건 앞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퇴보일 뿐. 중요한 건 ‘얼마나 갔느냐’보다 ‘어디로 향하느냐’니까.


 어쨌거나 우리는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한다. ‘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몸이 있으니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고, 자야 한다. 내 일, 내 가족을 제쳐두면서 남을 돕는 건 주객전도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성인(聖人)의 경지라, 이번 생에 끝을 보겠다는 대의를 품은 사람이겠지. 그게 아닌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한계를 받아들이자는 거다. 그 한계를 자꾸 깨려고 노력해야겠지만. 다만 어디까지?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살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남보다 나를 생각할 수밖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겠지만 그걸 최소한으로 하려고 하면서, 내 마음에도, 남의 마음에도 남지 않도록 노력해야지.




* 대웅전(大雄殿)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 단락/경판 - 불교학술원 아카이브 (dongguk.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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