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나는 아주 무기력하게 지냈다. 아침 수영을 추워서 그만둔 뒤부터였을까? 아침 알람이 울리면 한 번에 일어나지 못하고 알람을 미룬 뒤 다시 눈을 감고, 출근 시간이 다 되어서야 겨우 일어나서 씻고, 출근해서 환자를 보고, 환자가 없는 시간에는 진료실에서 누워있고, 스도쿠 등으로 시간 죽이기나 하고. 스도쿠도, 쉬운 건 내 성에 안 차서 어려운 거만 하는데, 풀리지 않으니까 또 스트레스를 받고, 자잘한 좌절감도 반복되고. 운 좋게 맞추면 그것대로 마음에 안 들고. 사람이 아주 쉽게 멍해진다. 우울해서 스도쿠를 하는 건지, 스도쿠를 해서 우울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시간을 계속 죽이면 안 되겠어서 스도쿠 앱을 지웠다.
의미 없이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글 써야 하는데, 책을 읽어야 하는데, 영상 수정도 해야 하는데. ‘해야 하는데’만 잔뜩 있고,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하고, 해야 하는 중압감에 짓눌리기만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그 와중에 하는 고민. 나는 부처님을 만났는가? 만났다면 이렇게 사는 게 맞는가? 이런 마음가짐은 맞는가? 나는 언제쯤 제대로 절에 몸을 담글 것인가? 영상법문부에 들어갔던 건 실은 그런 발버둥이었는데, 그게 제대로 된 도전이었나? 지금 그렇게 살고 있는가? 진심으로 내가 해야 할, 내 일, 내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나? 그냥 일처럼 대하고 있지는 않은가?
지난 법회(1/7)는 합창단의 마이크 설치 등의 문제로 준비 과정이 여러모로 부산스러웠다. 그래서 점심 먹을 시간도, 쉴 시간도 적었다. 올라가서 마이크와 음향을 확인하는 분들은 그 일을 했지만, 나는 붕 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가 다른 일을 돕기나 하고. 그렇고 저런 일들 때문인지 마음이 붕 떠서, ‘법복으로 갈아입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만 하고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법문을 해주심에 진정으로 감사하고, 법문을 제대로 듣겠다는, 옷차림이라도 바르게 하겠다는 마음이 있었다면, 준비하던 중에 내려가서 옷을 갈아입고 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는 법문을 듣다가 중간에 졸기까지 했다.
법회 끝나고 아버지께서 이번 법문은 불교의 핵심이라고 말씀하셔서 더 심란했다. ‘나는 졸았는데?’ 아버지께서는 그러니 내가 아직 불교에 마음이 확 온 것 같지 않다고 하셨다. ‘아예 쉬고 와야 하나?’ 하는 생각도 했다고 말씀드리니, 안 그래도 영상부 일을 하는 게 맞는지도 잘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발심(發心)은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을 일”이라고 하셨다. 정확하게 이렇게 말씀하셨던 건 아니지만, 뜻은 이랬다. 나는 아차 싶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생기지 않을까? 하고 기다렸던 걸 들킨 기분이었다. 맞는 말씀이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무엇이 변하랴? 내가 마음을 안 고쳐먹는데 보살님, 부처님이 도와주시려고 해 봤자 어떻게 도와주시랴? 뭐라도 해야지 가피를 주든가 하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데 뭘 어떻게 해주랴?
며칠 전 영상부 회의에서는 ‘왜 영상부 일을 하는지’에 대해 얘기했다. 내 차례가 되어서, 나는 무언가를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 영상부에 들어왔다고 했다. 예전에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말씀드리면, 아버지께서는 ‘네가 있는 그 자리에서 네가 하는 공부, 네 일을 잘하는 게 불교 일을 하는 거라고, 꼭 절에 나와서 일하는 것만 불교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라고 하셨고, 서울지부를 떠나면서 절 어른께서도 ‘네가 환자를 잘 봐서 이름이 난 뒤에 불교를 언급하면 그게 직접 절의 일을 하는 것보다 더 불교를 알리는 길이 아니겠느냐’라고 하셨지만, 내 고집? 내 선택으로 영상부에 들어왔는데 지금은 또 ‘어디로 가야 하죠’ 하고 있다고 고민을 말씀드렸다. 다른 절 어른께서 여러 말씀을 해주셨는데, 내가 이해하기로는 ‘지금 네 상태, 상황, 그에 따른 결과가 어떻든 거기에도 매이지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라’라고 받아들였다.
나는 뭐라도 해야 바뀌지 않나 싶었다고 그랬다.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것도 안 바뀌더라고요. 무기(無記)라는 말이, 유마경 영상 어딘가에서 나왔는데, 명부(명경대)에 ‘아무개가 모일 모시에 무엇을 했다’라고 적을 것도 없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예전의 저는 지금보다 더 세상일들이 허무하다고 느꼈거든요. 여자친구한테서는 그런 걸 배우고 있습니다.”
한동안 카톡 대화명이, ‘할 수 있는 만큼, 하지만 거기에 머무름 없이’였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되, 내가 이만큼 했다는 상에 매이지 말고 계속해서 하라는 의미였다. 근데 최근의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못 했다’라는 상에 짓눌려서 더 힘들게 지냈다. 그리고 과연 나는 ‘할 수 있는 만큼 했다’라고 자부할 수 있나?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나? 그런 생각을 하니, "할 수 있는 만큼 했다"라고 하고 다녔던 과거가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대화명을 다시 바꿨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엉덩이가 가벼운 사람이 되자’ 나름의 BA(Behavioral activation; 자성계自省戒)를 만들었다. 아침에 알람이 울리면 뭉그적거리지 말고 바로 일어나기, 출근할 때까지 핸드폰 게임 켜지 않기, 스도쿠 금지, 자려고 누우면 핸드폰 보지 않기.
월요일부터 아침에 일어나서 108배를 하고 있다. 벌써 수요일에 한 번 빼먹었다. 화요일 밤에 늦게 잠든 탓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또 머무를 수는 없지. 목요일인 오늘 아침에는 또 했다. 작심삼일도 10번이면 30일이다. 중요한 건 ‘못했다’라는 상에 매이지 않고,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걸 하는 거다. 108을 9 곱하기 12로, 9번 절할 때마다 면봉 1개씩 12개를 옮겨서 세는데, 면봉을 옮기면서 점점 가지런해지는 걸 보니, 어지러운 마음이 정리되는 걸 눈으로 보는 느낌이었다. 문득 만다라가 떠올랐다. 아주 정성 들여서 그리지만, 완성하고는 한순간에 다 흩어버리는 만다라. ‘내가 했다’라는 생각에 머무름이 없게 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반대로 ‘내가 안 했다’, ‘못 했다’라는 상에도 머무름이 없어야겠지. (그렇다고 대충 하면 안 된다!) 중요한 건 어제의 나와 얼마나 달라졌느냐이다. 하루하루 달라지면(일일신우일신(日日新又日新)) 아주 멀리 와있는 자신을 보게 되지 않을까. 그런 나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