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노메이크업(민낯)을 허하라는 글을 쓴 지 이틀 만에 '죽어라 화장한 이유'를 쓰자니 스스로 뭔가 의아하긴 하다.
어쨌든 나의 본업은 예능 피디고 올해 1월부터 7월까지 '팬심자랑대회-주접이 풍년'이라는 프로그램을 기획, 연출했다.
매주 수요일마다 있었던 녹화. 그날만큼은 나름 꽤 공들여 아침부터 화장하고, 최대한 단정한 옷을 골라 입었다.
실제로 매주 이런 내 모습을 보고, MC였던 이태곤 님은 "이열~ 편 피디 얼굴이 좋구먼" 혹은 "얼굴 좋아졌네, 광이 난다 광이~" 같은 딱 본인의 스타일에 맞는 호쾌한 칭찬을 해주었다.
이런 나의 화장을 말리는(?) 사람이 딱 한 사람 있었으니 바로 내 직속 상사이자 CP였던 선배였다. (*책임프로듀서를 뜻하는 CP는 보통 회사의 '부장님'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실제로 나도 가끔은 부장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선배가 나의 화장을 막는 이유는 즉슨, "메인 피디가 매주 멀끔한 얼굴로 연예인을 만나는 것보다 며칠 밤새고 못 씻은 얼굴로 나타나야 얻을 게 많다"는 것이다. 특히, 연예인과의 작업은 설득의 연속인데 '내 행색이 좀 딱해 보여야' 컨트롤도 용이해진다는 말씀이었다. 초보 메인 피디인 나로서 캐치 못한 부분이었고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난 풀메이크업+착장을 강행했다. 그 이유는 팬들 때문이었다.
내 팬도 아닌데 웬 성화냐 싶겠지만, 사실 누군가의 팬으로서 어딘가에서 존중받거나 대접받으며 산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보통 '팬'이라고 하면 극성이라고 일단 괄시하거나, 하대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사생 같은 잘못을 범하는 부류는 제외하고라도 말이다. 엔터테인먼트에서도 일했고, 방송국에서도 거의 10년째 일하고 있지만 이는 쉽사리 개선되지 않고 있는 슬픈 현실이다.
내가 몇 년간 공들여 기획한 <주접이 풍년>은 팬이 주인공인 프로그램이었다. 실제로 매주 녹화에 100명이 훌쩍 넘는 팬들이 객석을 채웠다. 그들에게 단 몇 시간 만이라도 '팬으로서 최대한 존중받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물론 실제로 피디의 차림에 관심이 없더라도, 팬들을 방송국까지 초대한 장본인인 메인 피디가 자다 일어난 행색으로 맞는 것보단, '나도 당신들과의 만남을 기대하고 준비했다'는 마음과 그에 맞는 단정한 모습으로 맞이하고 싶었다.
실제로 다녀 간 팬들은 우리 제작진들에게 "적게 일하고 많이 버세요."류의 덕담을 남겨주고 돌아가셨다. "내 평생 이런 일이 어딨냐"며 30년은 더 어린 나에게 90도로 인사하며 쓰레기까지 치우고 간 장구의 신 박서진의 팬카페 닻별의 회원들도 기억에 남는다. 녹화가 끝난 몇 주뒤, 멀고 먼 영덕에서 제작진 귀한 달걀 줘야한다며 손수 날달걀을 챙겨 온 송가인 님의 팬도 있었다.
그렇게 나는 1회부터 23회까지 모든 회차 녹화에 풀메이크업 상태로 참여했다. 고됐지만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주풍시즌2소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