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븐 시스터즈에 다녀온 건 영국 여행 3일 차 되는 날이었다. 그날은 런던도, 브라이튼도, 세븐 시스터즈가 있는 이스트본에도 하루 종일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특히 브라이튼과 이스트본은 강풍이 불었다. 우산이 뒤집어지는 건 물론이고 바람이 너무 거세서 사람 몸이 저절로 움직일 정도? 아무튼 아침을 먹고 런던 빅토리아역에서 1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브라이튼에 갔다. 브라이튼도, 옥스퍼드도 런던 근교에 있는데 서울로 치면 수원, 평택 거리쯤 될 듯하다.
빅토리아역에서 브라이튼 다녀오는 왕복 기차표. 사진=딱정벌레
브라이튼 역에서 내려 BBC 지역 라디오 방송국을 지나 버스를 타러 이동했다. 세븐 시스터즈에 가면 거기서도 1시간 버스를 타고 내려서 30분 걸어가야 했다. 주말에는 1시간이면 바로 가는 버스가 운행된다. 그러나 우린 평일에 갔기 때문에 그런 호사를 누릴 수 없었다. 앞서 이야기했듯 그날 바람이 너무 거세서 우산 쓰고 발을 떼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브라이튼도 항구도시라서 그런지 바람이 더 세게 부는 듯했다. 파도도 엄청나고. 그래서 버스 정류장을 찾느라 시간이 꽤 걸렸다. 게다가 런던과 다른 도시이기 때문에 대중교통 이용체계를 몰라서 버스 표를 따로 사야 하나 싶었다. 더 무서웠던 건 길에 빨간색 옷을 입은 어떤 미친 사람이 있었는데 혼자서 뭐라 뭐라 욕하면서 길을 걷던 어떤 여성을 갑자기 끌어안았다는 것. 참고로 그 광인은 남자였다.
브라이튼의 한국 음식점. 사진=딱정벌레
아무튼 길을 돌고 돌아 안내사무소를 발견했다. 버스 표를 어디에서 살 수 있냐고 물었더니 남자 직원이 우릴 보고 대뜸 “세븐 시스터즈에 가냐”라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묘한 미소를 지으며 건너편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 타고 표는 기사에게서 바로 사면된다고 알려줬다. 아마 그가 묘한 표정을 지은 이유는 그날 날씨가 세븐 시스터즈에 가기에는 너무 좋지 않기 때문인 듯하다. 그 표정만 봐도 ‘이 날씨에 거길 간다고?’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영국에서는 여행했던 지역 모두 기사에게서 표를 사면 됐다. 오이스터 카드는 런던 지하철에서 쓸 수 있는 카드였고. 여행 가서 가족선물을 살 때 제외하고는 돈을 많이 쓰지 않았는데 교통비가 많이 들었다. 참고로 왕복 비행기 표값은 100만원대 정도. 영국항공을 타고 다녀왔다.
코스타 커피에서 산 핫초코. 사진=딱정벌레
길을 건너서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세븐 시스터즈 가는 버스가 오려면 아직 시간이 좀 남았다. 10월 중순 영국 날씨는 한국보다 10도는 낮았다. 게다가 비바람이 거세서 더 추웠다. 브라이튼은 특히. 추운 몸을 녹일 겸 근처 ‘코스타’ 커피에 가서 핫초코를 사마셨다. 세븐 시스터즈는 한국인이 많이 찾는 영국 관광지 중 하나다. 영국을 여행할 때는 휴가철도 아니고 자유여행으로 다녀선지 몰라도 한국인을 많이 보지 못했다. 런던, 리버풀 같은 데서 어쩌다 한번 보는 정도. 그나마 한국인을 많이 본 곳은 옥스퍼드, 에든버러 정도였다. 옥스퍼드는 해리포터 촬영지고, 에든버러도 롤링 작가가 해리포터를 집필하고 촬영한 곳이지만 고풍스러운 도시 분위기 때문에 관광객이 많고. 특히 중국인을 많이 볼 수 있다.
브라이튼의 놀이공원 '브라이튼 팰리스 피어'. 바다 위에 있다. 사진=딱정벌레
브라이튼은? 외사촌 동생과 나 외에 세븐 시스터즈에 가려는 한국인 1팀 정도 있었다. 우리와 같이 버스를 기다렸고, 이스트본에서 내려서 비바람을 뚫고 30분 걸어가는 데 함께 했다. 물론 말 한마디 섞지 않았지만 그래도 궂은 날씨에 낯선 곳에 가는 만큼 침묵으로 서로 의지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버스가 도착했고 1시간을 달렸다. 차창 너머로 브라이튼 해안가가 보였다. 사진과 영상으로 본 브라이튼 모습은 여유롭고 낭만적이었다. 영국 젊은이도 많이 찾는 교외 지역이라고 들었으니까. 그러나 그날 내가 본 브라이튼은 무서웠다. 길에서 광인을 본 것도 그렇고, 비바람도 거세고 파도도 엄청났다. 조금 과장하면 재난영화에서 보는 파도 같다고 할까. 휩쓸리면 큰일 날 것 같은. 본 적 없지만 해운대 이안류보다 더 무서울 듯했다.
버스에서 내려 세븐 시스터즈까지 걸어가던 길. 촬영=딱정벌레
마침내 이스트본에서 내렸고 세븐 시스터즈를 향해 30분 동안 걸었다. 여전히 비가 내렸고 바람도 엄청났다. 여기서도 우산은 뒤집어지고 눈을 제대로 뜨고 앞을 주시하며 걷는 게 어려웠다. 관광객으로서 아무리 비바람이 거세도 낯선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 것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세븐 시스터즈까지 걷는 그 30분 거리는 뭐랄까. 인적이 드물고 고요했다. 목장에서 양 떼 울음소리가 들리는 정도. 대관령 양떼목장이 떠올랐다. 갈 때는 우리 말고 다른 일행도 있어서 덜 무서웠다. 그러나 왔던 길을 다시 돌아올 때는 우리밖에 없어서 무서웠다. 가끔 차가 지나다니긴 했는데 그 차 안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니까. 혹시 해코지라도 당할까봐 조금 두려웠다.
세븐 시스터즈 앞 바닷가. 촬영=딱정벌레
비바람과 사투를 벌이며 걷다 보니 서서히 또 다른 바닷가가 눈 안에 들어왔다. 역시나 브라이튼처럼 그 바다의 파도도 무시무시했다. 드디어 세븐 시스터즈에 도착한 것. 그러나 너무 정신없었다. 거센 바람 때문에 숨쉬기도 힘들고 바람이 자꾸 날 떠다 미는 느낌이었으니까. 화장실에서 머리를 단단히 묶고 세븐 시스터즈의 흰 절벽과 바닷가를 마주했다. 아. 감탄사가 저절로 나올 정도로 너무 절경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도, 울퉁불퉁한 흰 절벽도. 세븐 시스터즈의 흰 절벽은 비, 바람, 파도, 눈이 깎아놓은 자연의 산물이었다. 세븐 시스터즈라는 이름은 항해 중이던 어느 뱃사람이 지었다고 한다. 절벽에서 치솟은 부분이 7개 정도인데 내 눈에는 그것보다 많아 보이기도 했다.
세븐 시스터즈 앞 바다의 파도치는 모습. 사진=딱정벌레
풍경이 너무 멋져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고생 끝에 도착해서 그런지 더 감개무량하기도 하고. 오기 쉽지 않은 환경이었지만 뚫고 와서 보람됐다. 무엇보다 전부터 가고 싶었던 곳을 드디어 왔다는 점도 뿌듯했다. 사실 스톤 헨지도 가보고 싶었는데 일정 때문에 세븐 시스터즈와 스톤 헨지 둘 중 하나만 골라야 했다. 우린 런던에 3일 머물고 옥스퍼드로 이동할 계획이었는데 넉넉한 일정은 아니었다. 이 3일 중 하루는 런던에 도착한 날을 포함한 날이니까. 런던도 일주일은 봐야 하는데 빠듯했다. 스톤 헨지도 가려면 하루는 비워야 하고. 고심 끝에 세븐 시스터즈에 가기로 뜻을 모았다. 근데 그러길 잘한 것 같다. 뭐, 스톤 헨지는 그냥 고인돌이잖아. 다만 다른 사람들 여행 사진을 보면 세븐 시스터즈에서 돗자리도 깔고 햇볕도 받으며 인스타그램 감성이 느껴지는 사진을 잘도 찍던데. 우린 비바람과 사투를 벌이느라 완전 거지꼴을 했다.
카페에서 먹은 간단한 점심 요기. 사진=딱정벌레
뭐, 그래도 좋았다. 일단 왔으니까. 그리고 이런 날씨에 여기 구경하는 것도 흔한 기회는 아니니까. 그러나 여기까지 오는 데 너무 진을 뺀지라 요기를 하고 싶었다. 근처에 카페가 있어서 파니니와 사과 주스 따위를 사 먹었다. 영국에서는 사과 주스를 참 많이 마신 것 같다. 점심을 먹으며 쉰 다음, 밖으로 다시 나와서 세븐 시스터즈 절벽 위로 향했다. 사실 이 절벽은 지금도 깎이고 있기 때문에 위험했다. 거기에도 절벽은 따로 안내돼 있고. 재작년이었던가. 한 한국인이 거기서 추락사한 사고가 있었다. 기사도 나왔고. 그날은 비바람이 엄청났기 때문에 우리도 조심해야 했다. 끄트머리는 갈 엄두도 못 내고 그냥 좀 떨어져서 잔디 위를 걸었다. 거기서 바닷가를 내려다보고 한바퀴 돌아보고. 바람이 거세다 보니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몸이 떠밀리고 있어서 무서웠다. 외사촌 동생과 손잡고 걸었다.
세븐 시스터즈 절벽 위에서 내려다 본 바다. 촬영=딱정벌레
이번에는 내려와서 왼쪽 절벽 위로 올라갔다. 역시 끄트머리까지는 안 가고 떨어져서 구경했다. 앞서 올랐던 오른쪽 절벽도 바라보고. 편하게 구경하기 어려웠지만 그저 내가 이 이 시간에 여기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 서서히 돌아갈 시간이 다가왔다. 최대한 내 눈에 이 바다와 절벽을 담아두고 싶었다. 절경을 바라보면 왠지 감정이 고양되고 울컥해서 눈물도 핑 돈다. 노르웨이에서 들른 그리그 생가 주변 폭포가 그랬고. 세븐 시스터즈도 그랬다. ‘내 평생 살아서 여길 또 올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멀리 여행 오면 그런 생각이 종종 든다. 근데 한번 오기도 쉽지 않은 곳을 오면 특히 더 그런 것 같다. 또 올 수 있겠지? 와야지? 그때는 주말에 와서 편하게 1시간짜리 버스 타고 바로 와야지. 날씨 좋을 때 와서 사진도 예쁘게 찍어야지.
인도풍 건축 양식이 눈에 띄는 로열 파빌리온 궁전. 사진=딱정벌레
비감한 기분을 뒤로 하면서 다시 30분을 걸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올 때는 이 거리가 참 길게 느껴졌는데 갈 때는 금방 오는 듯했다. 오후 4시가 지났을 무렵이라서 날도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난 BBC 라디오 4를 듣다가 BBC 지역 라디오를 듣기도 했다. 지역방송이라서 그런가 한 DJ가 복수의 프로그램을 오래 진행하는 것 같았다. 물론 여기서 우리 관광이 끝난 건 아니다. 다행히 기차역 주변에서 걸어서 구경할만한 관광지가 또 있었다. 놀이공원과 인도풍으로 지은 로열 파빌리온 궁전 등. 지나가는 길에 눈으로 스캔하듯 구경했다. 놀이공원은 영업이 거의 끝났을 시간이었고. 바다 위에 뭘 깔아놓고 놀이공원을 설치해놓아서 신기했다. 이거 튼튼한가? 브라이튼 돔을 지나는데 ‘마이 디바인 코미디’ 공연 포스터가 붙여져 있었다.
브라이튼의 저녁 풍경. 사진=딱정벌레
브라이튼에도 한국 음식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영업시간이 끝났는데 유리창 너머로 이마트 노브랜드 과자가 있는 게 보였다. 브라이튼에서 런던 빅토리아 역으로 돌아가는 기차는 만석이었다. 우리 앞에는 어떤 남녀가 채식에 대해 이야기하며 저녁을 빵 쪼가리로 때우고 있었다. 기차 안이 포근해서 우린 꾸벅꾸벅 졸았다. 런던에 도착해서는 ‘아, 오늘이 런던에서 마지막 밤’이라는 생각에 속성으로 트라팔가 광장과 피카딜리 서커스 등을 구경했다. 미국 유명 패스트푸드 브랜드인 파이브 가이스 매장이 여기에도 있었다. 늦은 저녁으로 거기서 핫도그를 사 먹었는데 후회됐다. 여긴 햄버거를 먹어야 되는 건데. 피카딜리 서커스에는 런던에서 유일하게 LED 광고가 허락된 곳이 있다. 삼성, 코카콜라, 티파니 등 유명 브랜드 광고가 휘황찬란하게 펼쳐졌다. 그 광고를 마지막으로 구경하며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