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 아닌 여의도 '카페, 진정성'에서 마신 밀크티. 사진=딱정벌레9개월 만에 신촌에 갔다. 지난해 가을 예전 스터디 동료들과 점심 약속 때문에 만난 이후로 오랜만이다. 내게 신촌은 갈 이유가 거의 없는 동네다. 언론사 시험을 준비할 때는 가끔 스터디하던 곳, 향뮤직이 있을 때는 어쩌다 CD 사러 가던 곳, 첫 번째 직장에서는 취재차 종종 가던 곳. 이직한 뒤에는 전혀 갈 필요가 없는 곳. 어쩌다 점심 약속이 잡히면 가던 곳.
거기는 대학생에게 어울리는 동네 같았다. 대학가니까 당연하지만. 그렇다 보니 그 동네에서 점심 약속이 잡히면 언제부턴가 가기 어색했다. 어린 친구들 사이에 나 같은 사람이 거기에 발을 디디는 게 송구한 느낌? 홍대, 합정은 안 그런데(합정에는 지디넷코리아도 있고 언론사와 무관하지 않다). 예전 스터디 동료들은 중간 지점에서 약속을 잡기 애매해서 그런지 항상 이 동네에서 보자고 했다. 늘 홍익문고에서 만나서 이동하는 패턴.
유통 분야를 취재할 때는 그 동네가 나름 의미 있었다. 어쨌든 대학가니까. 난 유통업체들이 그 동네서 조용히 새로운 뭔가를 도모하는 게 엿보이면 주시했다. 정기적으로 가다 보면 새로운 걸 발견하기도 하고, 기사거리도 건질 수 있었다. 기사거리가 없더라도 젊은 세대를 미래 고객으로 사로잡으려는 유통업체들이 그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 볼 수 있다는 건 의미 있었다.
그 동네서 유통업체들이 도모하는 일 중 인상적이었던 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GS리테일과 KT가 손잡고 만든 가상현실 테마공간. 다른 하나는 무인양품 국내 최대 플래그십 매장. 전자는 유통업체가 VR 테마파크 사업에 뛰어들었다는 점에서 이색적이었다. 나중에 GS 쪽은 손을 뗀다고 들은 것 같은데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다. 뭐 더 건질 게 있을까 싶어서 공사할 때 찾아갔는데 아무도 없고 저녁에 가서 무서웠다.
후자도 운 좋게 공사 단계에 있을 때 처음 알았다. 유통 분야를 담당할 때는 난 평일부터 주말까지 구역을 나눠 지역별로 백화점, 대형마트, 면세점, 편의점, 드럭스토어, 복합 쇼핑몰을 다녔다. 오늘은 명동/광화문, 내일은 강남/가로수길, 모레는 이태원/용산, 내일모레는 신촌/이대/홍대, 어떤 날은 대학로/동대문, 또 다른 날은 잠실/위례/천호 등. 일산이나 판교, 하남 등 경기도 일부 지역도 갔다.
무인양품 신촌 플래그십 매장 공사 현장. 사진=딱정벌레기업에서는 언론에 알리지 않고 조용히 하는 일이 많았다. 테스트 차원에서 하는 것도 있고, 때가 되면 언론에 알리기 위해 그런 것도 있었다. 난 내가 모르게 중요한 일이 벌어지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내가 발이 느리거나 게을러서 기사거리를 다른 매체에 놓치기 싫었다. 그렇다고 굉장히 중요한 걸 건진 건 아니지만. 빨대가 없으면 발이라도 빨라야 하니까.
사드 여파로 매출에 타격을 입은 면세점이 영업시간을 조정하거나, 경영상 이유로 매장에 점원을 평소보다 적게 배치하거나, 100번째 매장을 초대형으로 내서 1위 사업자를 추격하거나, 브랜드명 변경을 테스트하거나, 오프라인 유통채널의 아픈 손가락인 젊은 층을 사로잡기 위해 매장을 어떻게 전면 개편한다거나. 이런 건 직접 다니면서도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현장에서 보고 알게 된 걸로 추가 취재를 하고, 다른 데서 접한 정보를 현장에 가서 확인하곤 했다.
말이 길었는데 아무튼 무인양품 국내 최대 플래그십 매장 구축 계획도 현장에 가서 알게 된 내용이었다. 어느 월요일 밤이었는데 취재차 가산디지털단지 마리오 아웃렛에 있었다. 저녁 먹고 집에 가고 싶었는데 왠지 그날 신촌을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귀찮았다. 거기서 너무 멀고. 그래도 5714번이 한 번에 가니까 참고 갔다. 밤 10시 가까운 시간에 도착했는데 우연히 무인양품 건설현장을 봤다.
당시에는 무인양품 강남 플래그십 매장이 가장 컸다. 근데 건설현장에는 국내 최대 면적을 자랑하는 플래그십 매장이 3월에 들어설 거라고 쓰인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층이 5층까지 있는 데다 매장 구성이 독특했다. 커뮤니티 기능을 강화한 게 눈에 띄었다. 공방도 있고, 인테리어 상담 같은 것도 받고. 당시 무지코리아가 이 건물에 들어서 있었다.
지금은 좀 달라진 듯한데 1층에는 신촌 지역 정보를 안내하는 '신촌 투고' 코너를 운영하고 테이크아웃 커피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고 했다. 2층에는 자수 공방을 처음 선보이며, 4층에는 독서·휴식공간과 이벤트 진행 장소인 '오픈 무지'가 들어선다고. 아무튼 추가 취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무지코리아 관계자에게 연락했다.
"왜 신촌에 최대 플래그십 매장을 여나요?"라고 물었을 때 그쪽 답변이 인상 깊었다. 학생들이 밀집한 지역 상권과의 연결고리를 만드는 데 있어 신촌이 적합하다는 것. 홍대·합정 상권은 확대되는 반면에 신촌 상권은 예전보다 덜 활성화돼 있다는 것. 아마 한국 본사가 거기 있으니 상징성 있는 매장을 거기에 두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만. 해외 기업이 국내 특정 상권의 활성화도 고려한다는 게 신선했다.
해바라기, 핑크 로즈, 샤먼트 장미. 사진=딱정벌레아무튼 그렇게 신촌에 국내 최대 무인양품 플래그십 매장이 생겼다. 무지에 가면 쉬는 기분이 들어 좋았는데 거기가 그랬다. 집 근처 무지에서 못 보던 제품도 있고. 자주 가지는 않았지만 신촌에 가면 한 번씩 구경했다. 나만의 피정의 시간. 그러고 보니 신촌오거리에 있는 투썸플레이스도 그 브랜드 1호 매장이라고 들었다. 상징적 공간이 많은 곳이로군.
이런 이야기를 하려 했던 게 아닌데. 사실 내가 신촌에 간 이유는 꽃을 사기 위해서였다. 평소 스노 폭스에서 꽃을 사는데 생각보다 매장이 여러 곳에 있었다. 난 왜 강남에만 있는 줄 알았던 걸까. 지도를 보니 신촌에도 있고, 집에서는 거기가 접근성이 더 나아 보였다. 사실은 주말에 평소 안 가던 곳을 가보고 싶어서 신촌점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신촌점에는 생각보다 꽃이 다양하지 않았다. 내 취향의 꽃이 다양하지 않은 걸 수도. 원래 봄꽃이 더 다양한가 싶기도. 장미는 워낙 여러 가지 있다 보니 또 사도 지겹지 않다. 근데 소국은 굳이 또 사고 싶지 않았다. 오래간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래도 크림 소국 꽃말은 마음에 들었다. '밝은 마음, 성실'. 내게 필요한 메시지였다. 백합은 저번에 샀으니 됐고, 향이 좀 무섭다.
그러나 내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은 꽃이 있었으니. 바로 해바라기였다. 그래, 여름엔 이글거리는 태양을 닮은 해바라기가 어울리지. 오늘 1 픽은 해바라기. 나머지 들러리가 중요했는데 쟈니 장미는 저번에 샀으니 패스. 사실 맨스필드 파크가 눈에 들어왔다. 제인 오스틴의 동명소설이 떠올라서 잠시 멈칫. 두대에 3900원인데 남은 게 별로 없고 상태도 그저 그랬다. 무엇보다 망설여지는 건 쟈니 장미와 비슷하다는 것. 배추가 떠올랐다.
지난주 사고 싶었는데 못 샀던 샤먼트 장미가 눈에 들어왔다. 핑크 로즈도. 흰색과 분홍이 은은하게 조화를 이뤘는데 해바라기와도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근데 맨스필드 파크의 제인 오스틴 감성 때문에 고민스러웠다. 꽃말도 좋았다. '영원한 사랑, 달콤한 사랑'. 더 생각해보니 꽃이 예뻐서라기보다 제인 오스틴에 의미를 부여하고픈 마음이 전부인 듯해서 그냥 포기했다. 샤먼트 장미와 핑크 로즈로도 충분해. 그런 꽃말은 얘네한테도 있다고.
이렇게 세 송이를 골라 기본 포장을 하니 무척 아름다웠다. 해바라기 줄기가 두껍다 보니 손에 쥐며 안정감도 있고. 들고 다니는데 마음이 든든했다. 나랑도 잘 어울리는 듯.ㅋㅋㅋㅋㅋㅋㅋ 머리가 커서? 아무래도 좋았다. 그걸 들고 무인양품, 현대백화점에 들렀다가 더 구경할 게 없어서 153번을 타고 여의도로 왔다. 오랜만에 서강대교를 건너는데 한강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서강대교는 내가 좋아하는 밤섬을 끼고 있어서 좋다. 밤섬 봉사활동 무척 하고 싶었는데.
최근 주문한 영양제 루테인, 비타민B. 사진=딱정벌레오랜만에 '카페, 진정성'에서 밀크티를 마시고 싶었다. 여기 메뉴는 이름이 너무 길어서 기억하기 어렵다. 아무튼 남다른 밀크티를 주문해서 마셨다. SK증권 건물 1층에 있는데 2층에 있던 바디프렌드 파크가 철수한 게 보였다. 아예 공간을 내놓은 건지 모르겠지만 안마의자는 다 치운 듯했다. 자주는 아니지만 어쩌다 한 번씩 가서 피로를 풀었는데. 아쉬웠다.
카페 진정성 밀크티는 쿠팡이나 헬로네이처에서도 주문할 수 있었다. 요새는 안 판다. 직영몰 가면 살 수 있겠지만 조금 아쉽긴 하다. 근데 직영몰이나 오프라인 매장에 가면 더 다양한 메뉴를 즐길 수 있으니. 여기 매장은 좌석은 편하지 않지만 독특하게 배치돼 있어서 기분을 환기하기에 좋다. 여길 좋아해도 자주 가지 않는 이유가 있다. 특별한 공간으로 남기고 싶어서. 자주 가면 흔해진다. 그러나 거리를 두고 가끔 가면 바람 쐬면서 기분 전환하는 느낌이 든다. 그 느낌이 좋다.
여의도에 내가 좋아하는 곳들이 있는데 카페, 진정성과 반디 앤 루니스 여의도점이다. 피그 인 더 가든도 있는데 거기가 좋다기보다 메뉴가 좋은 것. IFC몰과 여의도공원은 이용하긴 해도 좋아하지 않는다. 국회도서관은 좋다. 코로나 때문에 무기한 휴관 중이지만. 지하철 국회의사당 역에서 민트 초코 라테 파는 카페도 내가 좋아하는 곳. 거기 민트 초코 라테는 내 자양강장제랄까. 어쩌다 한번 마시지만 내게 힘을 준다. 자주 가는 안경점도 여의도에 있다. 주인분이 친절하다.
아무튼 밀크티를 마시며 글을 쓰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근데 버스를 잘못 타서 반대방향으로 갔다. 농심 사옥을 보고 기겁하며 반대편에서 버스를 탔다. 생리통 때문에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는데 더 긴장됐다.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고 다행히 무사 귀가했다. 좋은 날이었다. 수국이 금세 시들어 아쉬운 마음을 달랠 수 있도록 새 꽃을 샀고. 최근 주문한 영양제(루테인, 비타민 B)가 도착했다. 비타민D는 남았고 루테인은 다 먹어서 다른 제품을 이용하기로 했다. 영양제 챙겨먹으면 내게 잘해주는 느낌이 들어 좋다. 사라진 줄 알았던 여름 원피스와 반바지들도 찾았다. 든든한 기분이다. 앞으로 신촌은 평소보다 조금 더 자주 갈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