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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비평

-클럽 《창작과 비평》 프롤로그 5주차 과제

by 문장강화

이번에는 창비의 리얼리즘에 관한 특집 비평을 읽었습니다. 현 시대를 두고 많은 사람들은 사고의 죽음이라고 말하는데요. 사고의 죽음에서 사고의 끝에 있는 문학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지 알 수 있었던 순간이었습니다! 평론가들의 뜨거운 글들을 보며 소영, 유진, 은희가 생각을 품고 감정을 느꼈는지 한 번 읽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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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영: 한기욱, <사유•정동•리얼리즘-촛불혁명기 한국소설의 분투>


문학을 공부하면서 의외였던 점은 시대 구분의 중요성이었다. 문학은 분명 보편, 공통적인 것을 말한다. 하지만 그 시대에서만 할 수 있는 것 역시 말한다. 그렇기에 문학에 있어 시대 구분은 '시대만의 문학'을 정의한다는 점에서 퍽 중요한 위상을 가진다.
그런 점에서 한기욱의 논평에서 나온 "촛불혁명기"라는 단어는 눈여겨볼만 하다. 분명 촛불혁명은 우리 사회에 있어 민중이 거둔 큰 고발이자 성공이다. 그러나 냉정히 보면 진보-보수로 나뉘는 분열, 분열된 이들에 맞춘 언론들, 그리고 이런 분위기나 열광에 휩쓸려 '모르지만 따라가는' 이들 등, 무시할 수 없는 문제점들이 있다. 고발하되 사유하지 않고 즉흥적인 것. 한기욱은 이 문제점들을 (무)사유와 정동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요컨대 상투성과 혼탁한 언어사용이 무사유를, 필요없는 사람을 갈아치우는 자본의 수탈방식이 사람을 정동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태에 대해 문학은, 개중에서도 새로운 리얼리즘 문학은 어떻게 대처하는가. 한기욱은 황정은과 김세희의 소설들을 예로 들며, 새로운 리얼리즘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정리한다. 황정은의 경우 답을 주지 않는 애매한 질문을 통해, 김세희는 등장인물들간의 거리두기로 독자가 현실추수에서 벗어나 사유할 수 있는 장을 마련했으며, 정동적 요소를 통해 감각을 통해 사유가 가질 수 있는 상투성을 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유를 바탕으로 한 정동과의 조화를 이야기하며 마무리한다.
한기욱의 사유와 정동의 문제, 그리고 '촛불혁명기'라는 단어는 -다소 부정적으로 본 감도 있지 않지만- 옳은 지적이다. 현대에 있어 진실이란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이다'썰이나 '해장국 언론'이 팽배한 현실은 이를 증명한다. 그리고 이 현실에 맞게 사람들은 가면을 쓴다. "감정교육"과 같은 자기최면, 많은 위로의 책과 자기계발서 등. 객관적이지 않은 진실을 위해 객관적인 진실의 가면을 쓰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문학의 문제로 들어가면 약간 다른 질문을 할 수 있다. 제기하고 싶은 건 두 가지다. 과연 문학은 이 문제를 답습하지 않는가? 예시로 든 문학들이 촛불혁명기에만 할 수 있는 새로운 리얼리즘 문학인가?
잠깐 이야기한 찍어낸듯한 위로의 책, 많은 자기계발서, 그리고 각종 정치적 올바름에 편중된 도서들 때문에 위 질문에 대해 자신있게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무사유와 정동은 이미 문학 깊숙히 들어와 있다. 이것이 촛불혁명과 나란히 놓인 문제들과 결합하면서 문학은 문학의 본질을 잃고 선전물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기에 위에서 언급한 방법들로 문학 본질을 찾아가려는 시도들은 좋지만, 그것이 이 시대에 맞는 방법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질문하기, 거리두기와 같은 방법은 구시대-가령 이청준의 많은 책들-에서도 쓰였던 것들을 현시대에 끌어왔다고 '새로운 리얼리즘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아직 그런 독창적인 부분에까지 이르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 소설이 나오기에는 아직 우리 사회는 너무나 뜨겁고 그 기간은 짧은 듯 하다.
문학의 사유와 정동, 새로운 리얼리즘 문학에 있어 다소 아쉬운 부분들이 있었으나, 문제제기와 정의내리기는 젊고 신선했다. 촛불혁명기는 21세기로 보면 태동기이다. 아기는 계속 움직이며 좌충우돌하며 자란다. 거기에는 "정동이 내재한 사유"를 바탕으로 한다. 확언할 수 없으나 이렇게 온몸으로 밀고 당기다보면 그가 고민하던 사유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해본다.




-김유진: 복도훈, <SF와 새로운 리얼리티를 찾아서-김초엽과 박문영의 소설을 중심으로>


처음 읽은 SF는 너무나도 어려웠다. 이해할 수 없는 시공간의 개념과 낯선 단어들이 나열되면서 문장 하나하나를 읽는 것 마저 힘들었다. 그런 SF문학들을 마주하다가, 어느 날 문득 상징으로 가득한 존재들을 인식하고 결국에는 지금과 다를 바 없는 사건(문제)들을 볼 수 있었다. 현재와 멀어지면서 현실과 가까워지고 이를 통해 SF문학의 리얼리티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에게 SF라는 것은 공상과학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선은 소설의 범주 안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이해하기에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만큼 SF가 지니는 특수성을 무시할 수 없었으리라. 그리고 이것은 나만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때부턴 SF문학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시공간이라 하더라도, 소통의 문제로 걱정하고 외로움을 느끼며 우월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이 이야기를 이끈다. 그니까 결국은, 공상 속에서 리얼리티를 본 것이다. 하지만 사실 단순히 리얼리티가 강점이라고 한다면 그것으로 SF문학을 설명하기엔 당연히 부족하다. 모든 소설에서 공통적으로 발현되는 리얼리티가 SF문학에서 더욱 도드라지는 이유는, 그리고 그것이 지속되어 가는 것은 무엇일까. SF문학에 지니는 의문점을 창작과 비평 2019 겨울호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복도훈 문학평론가의 말을 빌리자면 “덜 밝혀진 현실의 뒷면에 대한 탐구”의 진행과정이 현 SF 문학의 위치이다. 덜 밝혀진 현실의 뒷면. 이것이 SF문학만의 특수성이다. 그리고 그것이 ‘SF와 새로운 리얼리티를 찾아서’의 새로운 리얼리티에 해당하는 부분일 것이다. 없는 공간을 통해 현실의 뒷면을 내보이고 그러한 방법을 통하여 더욱 현실의 문제를 탄탄히 만드는 것. 그것은 SF문학이 아니고서는 결코 내보일 수 없는 부분이다. 그렇기에 그 뒷면을 더욱 견고히 할수록 SF문학은 스스로의 자리를 더욱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윤은희: 송종원, <공동세계를 위한 시의 모험>


시는 ‘극단적이지만, 가장 극단적이지 않게 느껴지는 글의 형태’라고 생각한다. 마치 어렵지만 쉬운 것처럼 말이다. 쉽게 말해, 요점정리를 하는 건 힘들어도 보는 건 쉬운 것 같이, 감정이 그런 형태로 내게 다가온다. 네 개의 특집들 사이에서도 해당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그렇다. 시를 좋아해서이다. 좋은 걸 더 보고 싶지 뭐 그런 여타 거창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D
해당 특집 글은 공동을 중심으로 쓰인 것 같았다. 우리 현실의 문제들은 차별과 소외를 불러일으켰고, 해당 문제에 대해 투쟁하는 인간, 냉소적인 인간 등 모두 공동의 감각을 위한 노력을 어떠한 형태로 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 예시들로 세 권의 시집을 분석하고 감수성 회복, 노동, 밥, 적대와 연대 등 다양한 부분에 대해 다양한 시도를 하였고, 총체적으로는 인간다운 삶을 살기를 위함이라고 이해했다. 가장 좋았던 점은 ‘김사이, 김해자, 이설야’ 세 분의 시들을 접하게 해주었다는 점과, 새로운 시선을 가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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