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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랑 Oct 08. 2020

억새와 바람은 같이 간다

 억새가 피기 시작했다.

 억새가 핀 산등성이, 들녘, 공원 한 귀퉁이에 자꾸 눈길이 간다.


 내게 억새는 어떤 존재감으로 온다. 억새를 볼 때마다 스무 살 무렵이 떠오르니까. 왜 그렇게 스무 살은 무거웠던 것일까? 어깨에 너무나 많은 것들이 올려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토록 가고 싶던 학교를 포기하지 못하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학력고사 준비를 위해 근무가 끝나면 사무실 앞 독서실 계단을 올랐다. 형편이 원활하지 않은 집의 맏이는 대학을 갈 수 없다. 빤히 알면서 부모에게 시위하듯 공부를 했다. 


 어느 겨울 막차 버스 시간에 맞춰 독서실을 나오려는데 신발이 없다. 한겨울에 여름 슬리퍼를 신고 버스에 올랐다.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 아니 마음이 더 추웠다.


 첫 월급 타서 큰 맘 먹고 장만한 랜드로버였다. 기분 좋게 구워진 빵 껍질 색깔의 신발이 감쪽같이 없어진 것. 아니 누군가 훔쳐갔다. 복합적인 감정들이 함께 밀려왔다. 허탈함이 쓰고 아팠다. 


 그 후로도 삼 년 더 공부하다가 스스로 지쳐 떨어졌다. 대학에 갈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만 남았으니까. 사무실 직원들도 말렸다. 지금 아니어도 공부는 언제든 할 수 있으니 부모님 생각해서 다음에 하라고. 그때는 그랬다. 


 쉼 쉴 곳이 필요했다. 이곳 아니면 어디든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추를 단 것처럼 무겁고 거추장스러웠다. 그럴 즈음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억새가 눈에 들어왔다. 하얗게 산등성이를 나부끼던 억새가.


 억새는 가벼웠다. 무심했다. 자유롭게 나부꼈다. 억새가 부러웠다. 그 가벼움이.


  억새는 비우는 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친다. 억새를 보고 있으면 너무 많은 것을 지니고 사는 것 같다. 훌훌, 좀 가볍게 살 일이라고 넌지시 말을 건네는 억새.


 나중에야 알았다. 

 억새의 가벼움이 얼마나 많은 인내와 시련을 견뎌낸 것이었는가를. 

 아픔을 덜어낸 시간이었는가를. 


 억새는 바람과 함께 간다. 그 바람은 억새의 시련이고 인내이고 아픔이며 슬픔이다. 하여, 억새는 하얗게 나부끼며 가을을, 존재를 증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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