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날의 시선 19
산책길에 진달래를 만났다. 꽃을 향해 서둘러 야산을 오르는데 여린 가지 끝에 매달린 꽃이 환대라도 하는 듯 분홍 낯빛을 하고 바람에 일렁였다. 아, 느닷없이 맞닥뜨린 이 분홍을 어찌 해석할 수 있을까. 천지 무채색 대지에 분홍이라니, 이것이 환대가 아니고 무엇이랴. 긴 겨울을 나느라 애썼다고, 춥고 아팠고 외로웠던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 살랑살랑 정겨운 몸짓이 아닌가.
죽은 듯했던 가지에 물이 올라 분홍을 터뜨리는 일은 기적이다.
문득 어쩌면 진달래도 위로받고 싶은 것은 아닌가 싶은 마음에 살짝 어루만진다. 이토록 어여쁜 분홍을 준비하느라 얼마나 많은 시리고 무섭고 지난한 밤과 시간을 보냈을까.
그렇게 견딘 끝에서야 비로소 터뜨린 분홍 숨이 아닌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이유다. 견딘 것들은 견딘 만큼의 두께를 공유한다. 사는 일이 휠 것 같은 사람은 보인다. 그들이 보내는 그들만의 어깻짓 같은 것.
진달래는 홀로 피어나 다정하게 쓸리며 눈길 끄는 사람들의 마음을 덥힌다.
진달래는 피고 지는 일에서 의연하다. 허무를 깃들이지 않는다. 삶을 묵묵히 성실하게 살아낸 한 사람의 생애 같고, 기특하게 잘 살아내고 있다고 말없이 쓰다듬어주고 싶은 어린 동생 같다. 저 홀로 피다 스르르 진다고 해도 산이 먼저 품어주는 진달래다. 떠나간 사람들의 영혼이 돌보는 듯 기꺼이 살아내는 야무진 꽃이다. 희미하게 떨고 있으나, 결코 희미한 생애가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그 여유가 넉넉하다.
마른 잔디 엉클어지고 나뭇가지 어수선하다. 초록의 싹을 준비하지 않은 갈색이 지천인 산에 저 홀로 오롯한 분홍의 진달래가 환상적이다. 분홍빛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면 세상은 그제야 나른했던 기지개를 켜며 움츠렸던 제 몸을 푼다. 햇살이 노곤해지면 이제 무엇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이다. 그들의 세상은 두드러지며 뽐내지 않는다. 묵묵히 자기 몫을 살다 간다. 목덜미에 스치는 바람을 지나 진달래 곁을 맴도는 바람이 분홍을 출렁인다.
봄은 빛이 흐르는 곳으로부터 온다. 그곳에 영락없이 봄이 고여 있다. 있는 듯 없는 듯 차갑던 기억 밀고 툭, 분홍이 나왔다. 엄살부리지 않고 씩씩하게 헤치고 나와 척, 발을 내민다. 가두었던 신명을 풀고 소년 같은 봄이 한바탕 봄 풀이를 한다.
살갗처럼 예민하고 고단한 현실에 서 있더라도 마음의 빗장 풀고 신음하듯 토해내는 봄날의 함성에 어깨도 한 번 으쓱, 추어올려 볼 일이다. 숨죽였던 시간을 딛고 피어난 꽃의 무게에 내 마음을 얹어 보는 것이다.
이토록 커다랗고 조용한 위안도 없으리라. 죽었던 대지에서 만나는 분홍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