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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랑 Jan 23. 2024

바람의 언어를 듣기로 한다

보통날의 시선 17


 바람이 몹시 불었다. 눈발이 날렸고 사람들은 다시 어깨를 움츠렸다. 무심코 나선 길에 맞닥뜨린 회오리바람에 놀라 가던 길 주춤하는 아파트 1층 여자와 마주쳤다. 눈보라가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한바탕 들썩이다 사라졌다.


 바람이 불었다. 모든 것이 일시에 뒤집혔다. 지상의 것을 포함 공중의 것까지. 간혹 나부끼는 것들에 편승하여 내 옷자락도 뒤집히곤 했다. 


 오후에는 바람 찬 바다 그림 앞에 섰다. 바다는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어 때로 무섭기 그지없다. 바다에서 이는 바람의 처음은 어디일까. 바다의 깊이만큼 바람의 깊이도 그럴까. 풍랑이 이는 거센 바다를 앞에 두고 잠자코 바라볼 수밖에 없는 어느 날의 짙푸른 바다를 떠올렸다. 망망대해, 푸르고 푸른 것 앞에서는 그저 푸른 바람과 말없이 마주할 뿐이다. 


 오늘처럼 눈보라가 치는 날이면 마음이 골똘해진다. 그리고 가장 먼저 향하는 곳이 있는데, 바로 시골집이다. 비어 있다.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에 얼마나 많은 눈과 바람이 살까. 훈김이 사라진 곳에 바람만 드나드는 일을 생각하면 마음 끝이 시리다. 덜컹거리는 대문, 펄럭이는 비닐, 삭아가는 빨랫줄, 빈 가지로 서 있을 감나무와 자두나무, 아귀가 틀어지고 있을 창문, 부재한 것들이 가져오는 흔들림을 차라리 바람이라도 드나들고 있어서 다행인 건가 싶기도 하지만, 마음 쓰이는 것 마찬가지다. 빈집은 바람의 집이다. 


 바람결에 민감한 편이다. 구체적 의미도 모르면서 중학교 때 접한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시 ‘해변의 묘지’에 나오는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를 입버릇처럼 외우고 다니며 한껏 감상적으로 되곤 했다. 그래서였을까?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이면 유난히 명료해지는 마음과 만난다.  


 모든 흔들리는 것들의 정서가 어쩌면 슬픔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한 것은 유치환의 시 ‘깃발’을 만나고서였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무한히 뻗어 나가고 싶은 자유의 한계가 깃발로 묶여 공중을 나부끼고 있었다. 한 발짝 나아가지 못하는 발목 잡힌 내 자유도 저렇게 공중에서 푸른 절망을 나부끼고 있었다. 


 바람의 얼굴은 단지 지나가는 것이다. 눈여겨보지 않는다. 멈추지 않는다. 인연을 만들지 않는다. 스치듯 지나가지만 보이지 않는 흔적이 오래 남는다. 바람을 들일 줄 아는 사람에게만. 


 건너편 아파트 화단 목련 가지 사이로 바람이 지나갔다. 목련은 바람의 방향으로 잠시 휜다. 그러다 또 그만이다. 목련은 바람이 머물다 가도 그저 목련이다. 자유를 갈망하는 것은 그걸 바라보는 자의 몫이다. 


 오늘은 폭설이 내렸고, 바람의 방향은 종잡을 수 없었다. 밖에서 돌아와 바람 일렁이는 푸른 바다를 마저 그렸다. 


 자우림의 ‘야상곡’을 들으며 바람의 언어를 힘껏 듣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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