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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랑 Jan 08. 2021

그리운 찐빵




 하얗고 폭신폭신한 것, 따뜻하고 달곰한 것, 가끔, 동그랗게 떠올리며 먹고 싶다는 생각보다 먼저, 그립단 생각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것, 바로 찐빵이다.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70년대는 우리나라에 수입 밀이 들어온 시기다. 쌀 생산량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식생활개선정책으로, ‘혼분식장려운동’을 시행했던 때이다. 하얀 쌀밥보다 보리나 밀가루 음식을 장려하는 ‘분식의 날’도 있었다.


 대부분의 아이 도시락은 보리쌀이 듬뿍 들어가 거무튀튀했다. 먹기 전부터 입맛 떨어지게 했을 법도 한데, 의자에 앉아 있는 수업 시간만 빼고는 운동장에서 줄곧 뛰놀던 아이들의 식욕은 그런 보리밥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느 날, 선생님은 학교 옆 동네에 있는 반 친구네 보리를 베러 간다고 했다. 일종의 봉사활동이었나 보다.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무엇을 얼마나 했을까 싶지만, 우리는 신 났고, 재밌는 놀이었다.


 일 한 기억은 없어도 먹은 기억은 있던 그날.


 저기 논둑 쪽에서 친구 엄마가 머리에 무언가를 잔뜩 이고 오시는 게 보였다. 친구는 늦둥이였던 걸로 기억하고, 엄마는 좀 나이가 들어 보였다. 선생님이 계셔 그런지 몰라도 깔끔하게 차려입었다는 걸 어린 눈에도 보였는데, 흰 무명 앞치마를 두르고 계셨다. 


 찐빵이었다. 김이 나는 걸 보니 방금 쪄서 부랴부랴 가지고 나온 것 같았다. 60여 명이 넘는 아이들은 찐빵을 먹으며 행복했던가. 늘 시커먼 보리밥만 먹다가 밀가루로 만든 하얀 찐빵을 손에 들고 환호성을 지르는 아이도 있었으니 말이다. 우리에게는 특별한 날이었던 게 분명하다. 


 심심한 색과 모양을 하고, 붉은 팥소를 숨긴, 따뜻하고 부드럽던 찐빵은 맛있었다.


 보리 베고 난 논을 손질해 모내기를 준비하는 유월이었고, 우리 앞에 펼쳐진 하늘은 푸르고 넓었다.


 친구 엄마의 무명 앞치마와 하얗던 찐빵은, 70년대를 통과한 내 어린 시절 한때가 고스란히 배어 있는 소중한 그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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