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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랑 Oct 18. 2021

아버지의 일기장


 일곱 권의 아버지 일기장을 가지고 있다. 거의 십여 년 동안의 일기다. 이사하면서 사라진 그동안에 쓴 여러 권의 일기 말고 최근 돌아가시기 직전, 그러니까 집을 나서 병원에 입원을 결정하기까지의 일기인 셈이다. 


 나는 일기장을 들여다볼 수 없어 겨울이 다 지나도록 빈집에 남겨둔 채로 오가며 마음만 쓸고 또 쓸었다. 


 동생은 어쩌자고 아버지의 일기장을 남겨두었는지 묻지 않았다. 그냥 거기 그렇게 아버지인 듯 일기장은 방 한구석에 놓여 있었다. 


 이듬해 봄 결국 나는 먼지 앉은 아버지의 일기장을 문밖으로 꺼내 닦고 또 닦으며 어루만졌다. 봄 햇살에 거풍을 시켰고 일기장을 집으로 가져왔다. 쉽게 읽지 못했다. 그렇게 또 한해가 지났다. 저 일기장을 어떻게 하지. 사실 아직도 결정하지 못했다. 


 어쩌다 슬쩍 아버지의 어느 하루를 들추면 눈물이 쏟아져 그만 덮고 만다. 정확하게는 아버지를 세심하게 돌봐드리지 못했다는 자책과 함께 너무나 허망하게 가신 아버지와의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일기장을 끝내 어쩌지 못하는 것 같다.  


 아버지는 내게 기록하는 것의 숭고함을 가르쳐주셨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아름답던 아버지의 모습은 일과가 끝난 뒤 방 한쪽에 등불을 밝히고 앉아 농사일지를 쓰는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농사 일지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다 우연히 노트를 들춰 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농사일지 겸 일기였다. 


 그 후로 수십 년 동안 아버지의 일기를 보지 않았다. 그날 보았던 아버지의 일기는 내게 아버지라는 사람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 하나의 사건 같은 것이었다. 


 시내에 볼일 보러 나갔던 날, 친구분들이 어디 다방에라도 가서 좀 놀다 가자는 청을 뒤로하고 서둘러 집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심정을 아버지는 일기에 적어 놓았던 것인데, 나는 그날의 아버지 일기를 보면서 맏이의 책임감 같은 것이 형성되었다. 


 가장으로 해야 할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한 남자의 버겁기만 한 인생을 엿보게 되었다고나 할까. 아버지를 아버지라 보지 않고 가족을 이끄는 가장으로서의 한 남자를 보게 된 것이다. 


 아버지의 일기를 들여다보는 일이 좀 편해질 때 일기를 정리해서 가족들과 함께 볼 수 있게 엮어보고 싶고, 한편으론 그냥 아버지 곁으로 훨훨 날아가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기록하는 일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한다. 말로 다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행위고, 기록하는 일은 더 숭고한 마음의 어떤 행로 같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때 남긴 일기가 누군가에게 읽힐 거로 생각하면 기분이 묘하다. 그렇다 해도 그것이 일기 형식이 아닌 다른 장르의 기록일 때 우리는 기록의 정의를 다르게 해석한다. 


 일기가 한 개인의 지극히 사적인 글이라 해도 일기는 결국 사람 살아가는 누구나의 보편적인 이야기일 수밖에 없고 보면 일기 또한 개인의 소중한 기록을 넘어서는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다. 다만 사는 이야기 안에서 엿볼 수 있는 삶에 대한 자세라든가, 사유, 행동, 나아가 성장의 부대낌을 기록한 의지가 깃들어 있는 글이라면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으며 타인의 공감을 얻어내기에, 충분한 기록이 될 수 있다.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나는 기록하는 삶을 산다. 그런 삶이 편하고 좋다.


 아버지의 팔십 대 삶이 고스란히 담긴 일곱 권의 일기가 내 곁에 있다. 이 일기가 있는 한 내 삶의 소중한 지침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릴 적 좋아했던 아버지의 기록하는 모습을 두고두고 생각하게 하는 일곱 권의 일기가 오늘의 나와 맞물려 이어지고 있음을 새삼스럽게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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