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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랑 Dec 02. 2021

사과는 겨울에


 나는 경북 군위군 부계면 사과를 좋아한다. 특히나 초겨울 희끗희끗 눈발 날리는 날 부계면 길에서 사 먹는 사과 말이다. 


 대구 팔공산 능선을 끼고 있는 부계면은 경치가 좋아 드라이브 코스로도 유명한 곳이다. 그곳에는 삼국시대에 창건된 제2석굴암이 있는데 특히 삼존석굴은 통일신라 때 만들어졌고 국보 제109호로 지정되었다. 석굴암의 선례가 된다고 제2석굴암으로 불린다고 한다. 


  “사과 사러 가자!”하면 군위로 가는 줄 알고 식구들은 각자 채비를 했다. 사과도 사고 칼국수도 먹고 드라이브도 하는 날, 집에서 좀 멀리 가는 외출이라는 걸 알아차린다.


 부계면뿐만 아니라 팔공산 자락을 끼고 죽 이어진 마을은 아늑하고 깊다. 산이 아우르는 곳에서 살아서일까. 인심도 후하다. 사과를 사면 덤이 따라오는데 사과나 감, 농작물을 팔면서 가지고 나온 푸성귀는 덤일 때가 많았다. 


 제2석굴암을 천천히 둘러본 후 밖으로 나오는 길에 몇 개의 가게가 있는데 어디라도 좋다. 거의 모든 가게에서 멍석만 하게 큰 반죽을 밀어 칼국수를 파는데 시골집에 들어선 듯 멸치 육수 국물이 진하게 퍼져 어느 집이라도 들어가 칼국수 한 그릇 먹고 가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칼국수다. 어린 배추를 데쳐 김 뿌려 내놓기도 하고 어느 집은 감자와 애호박 고명이 올려져 있기도 한데 한 그릇 먹고 나면 부러운 것 없다.    



 사과는 돌아오는 길에 산다. 사과 때깔을 말해 무엇하랴. 붉고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사과는 부사인데 단단하기 이를 데 없고 과즙이 흥건하다. 빨리 먹고 싶어 애타는 마음을 아는 부계 사람들은 또 몇 개의 사과를 따로 얹어주는데 오는 길에 베어 먹는 사과 맛은 집에서 먹는 사과 맛하고는 비할 데 없이 특별하다. 사과 먹을 겨울이 있다는 건 행복이다.


 어느 해인가. 초겨울이었다. 휴일이었고 하늘은 어두컴컴했다. 일요일을 티브이 앞에서 보낼 가족을 끌고 집을 나섰다. 사과도 살 겸, 외출이다.


 부계면에 도착할 즈음에는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이른 시간이어서 아직 사과를 파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사과 수확이 끝난 과수원은 휑한 바람만 무성했다. 그 많던 붉은 사과들은 이제 저온 창고로 들어갔을 것이다.


 곧 큰 눈이라도 내릴 듯한 예보를 담고 있는 듯 멀리 팔공산의 능선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오늘은 아무도 안 나오나보다 하며 두리번거리는데, 저 멀리 조그맣게 쪼그리고 앉은 할머니 한 분이 눈에 띈다. 두툼한 털 스웨터에 보자기로 둘둘 동여맨 머리가 겨울 아침을 단단히 감고 나온 듯했다. 


 “추운데 이렇게나 일찍 나오셨어요.”

 “놀만 뭐하나. 아들 애타게 농사지었으니 쪼매 돕고 싶어 그라지.”


 뭐 마실 것이라도 드리고 싶을 만큼 날은 추웠다. 근처엔 가게 하나 없고 마을만 이어져 있었다. 마음 같아선 가지고 나온 사과를 전부 사드리고 싶었다. 아들 내외가 쌓아 놓고 간 사과 상자가 할머니를 감싸고 있어 그나마 바람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과를 사고 돌아오는 길, 마음이 편치 않으면서도 할머니의 건강한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할 수 있으니 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기로 한다.


 그렇게 사과 사러 가는 길이라는 풍경 하나가 내게 남았다. 그 후로 사과는 대체로 부계면 사과, 특히 그 할머니의 사과를 샀다. 사과는 부계면에서 나는 겨울 부사를 최고로 치는데 그것은 순전히 내 취향이다.

 희끗희끗 눈발 날리는 초겨울 아침, 사과를 앞에 놓고 앉아 있던 할머니, 내 생의 어떤 날 하루 풍경은 오래 마음 그림 한 장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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