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냥년. 요즘 젊은이들은 이런 말을 잘 쓰지 않지만 아직도 어르신들은 행실이 부정한 여성을 지칭할 때 ‘화냥년’이라며 욕을 하신다.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화가 난 여성’의 줄임말이 아닐까 정도로 추측했다. 사람은 싸우다가 감정이 격앙되면 상대에게 욕을 내뱉기도 한다. 별 뜻 없이 감정 분풀이 정도로 내뱉는 욕. 하지만 그 뜻을 알고 나면 차마 입에 올리기 힘든 것들이 생각보다 많다.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 꽁꽁 얼어붙은 한강 바닥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는 삼배구고두례를 행했다. 이른바 ‘삼전도의 굴욕’이다. 인조의 아들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청나라의 인질이 되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조선인들은 포로가 되어 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끌려가게 됐다. 끌려가는 백성들은 임금에게 살려달라고 간절히 애원했다. 당시 상황을 나타낸 <인조실록>의 기록이다.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전쟁이 터지면 일차적으로 전쟁터의 남성들이 목숨을 잃는다. 힘없는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가는 백성들 중에는 수많은 여성들이 있었다. 볼모로 잡혀간 여성들은 치욕스러운 곤욕을 치러야 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오랑캐의 포로가 된 자가 반이 넘고 각 진영 안에는 여자들이 무수했다. 이들이 발버둥 치며 울부짖으니 청군이 채찍으로 휘두르며 몰아갔다
청나라 군인들은 포로가 된 조선 여성들을 성적 노리개로 삼았다. 포로가 되어 중국 심양까지 억지로 끌려간 것도 서러운데 상상할 수 없는 고초를 치러야 했으니 그녀들은 얼마나 고향이 그리웠을까. 이역만리에서 모진 수모를 당하고 간신히 조선으로 돌아온 부녀자들이 있었다. 이때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의미로 그녀들을 ‘환향녀’라고 불렀다.
하지만 어렵사리 고향으로 돌아온 여성들은 또 한 번 굴욕을 당한다. 몸이 더럽혀졌다는 이유로 남편에게서 버림받은 것이다. 사대부들은 정절을 잃은 환향녀와는 살 수 없다며 고향에 돌아온 여인들을 버리고 새장가를 들었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사로잡힌 부녀들은 비록 본심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변을 만나 죽지 않았다. 어찌 절의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청군에게 잡힌 여인들은 모두 자결을 해야 한단 말인가. 사대부들은 여성들을 ‘정절을 잃었다’ 면서 내치는 것도 모자라 그 여성이 놓은 자식을 ‘호래자식’이라 하며 폄훼했다. 여성들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상처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유교 국가니까 정절이 중요하다고? 그렇게 잘난 남성들의 충은 어땠는가. 사실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고 절의를 잃은 건 사대부 자신들이 아니었던가.
서울에 홍제천이 있다. 귀국하는 환향녀들이 여기서 몸을 씻으면 모든 과거를 잊게 했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나는 홀로 홍제천을 산책하면서 그녀들을 떠올렸다. 힘이 없는 나라에서 태어나 전쟁의 볼모로 잡혀갔다가 고향에 돌아온 ‘환향녀’. 이토록 슬픈 역사가 그녀들을 향하는 욕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이 매우 안타깝다. 나는 이 문제가 그저 옛날이야기 정도로 치부되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전쟁이 일어나면 늘 여성들에 대한 억압과 성폭력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20만 명에 달하는 조선 여성들이 성노예로 학대받았다. 대다수가 20세 이하였고, 12세 소녀도 있었다.
그녀들은 대부분 결손가정 소녀들이었다. 학교 교육을 받지 못했고 모든 면에서 차별을 받았다. 위안부에 동원된 소녀들은 생계를 위해 일거리를 찾다가 취업 사기로 끌려갔다. 인신매매로 납치당하거나 취업 사기로 끌려간 소녀들은 대부분 사회적 약자였다.
하지만 이 끔찍한 문제는 사회에 알려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유교 문화가 짙게 배어 있는 한국에서 자신이 과거에 겪은 고통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순간 ‘더러운 여자’가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과거가 알려진 ‘위안부’였던 여성들은 집에서 쫓겨나거나, 창녀 취급을 당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자식들조차 그녀들을 외면했다.
환향녀와 위안부. 모두 누군가의 어머니였고, 누이였고, 아내이거나 딸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이 겪어야 했던 사회적 차별과 억압은 전쟁이 할퀴고 간 뒤에도 계속 남았다. 우리 곁에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들에게 주목했다.
국제 인권단체인 <엠네스티>가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위협에 맞서 모든 사람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활동하는 단체이다. 나는 <엠네스티>의 펀드레이저로 활동하면서 ‘위안부’와 여성인권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았다.
‘위안부’는 민족 문제 이전에 여성문제이자 국내에서 가장 시급한 인권문제이다. 일본군이 조직적으로 여성에게 저지른 잔혹행위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 전쟁범죄 피해자들은 지금도 끊임없이 정의를 요구하고 있다.
현재 ‘위안부’ 생존자 대부분이 90대 노인으로 그 수가 계속해서 줄고 있다. 이제 국내에 위안부로 등록되어 있는 생존자는 서른 명이 채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배상에 관한 문제 해결은 나날이 더욱 시급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해결해야 할 또 다른 문제도 남아있다. 베트남 전쟁 시 파병된 한국군들의 전쟁범죄가 있다. 그들은 국가를 위해 몸 바쳐 싸운 영웅들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우리가 모르던 사실이 있다.
해방 이후 한국군은 일제 군대문화와 제도들을 그대로 답습하고 행했다. 일부 한군 군은 베트남 민간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했을 뿐만 아니라 베트남 여성들을 빈번하게 성폭행했다. 한국 군인과 베트남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2세 문제는 아직도 풀어갈 길이 멀다.
우리는 전쟁 피해 국가이면서 동시에 가해 국가가 되었다. 한국 정신대문제 협의회(정대협)의 이사장이었던 윤미향은 베트남 전쟁 피해자들에게 사과하는 1인 시위를 했다. 당시 그녀가 하는 말이다.
한국 정부와 한국사회는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인들이 저지른 전쟁범죄로 인해 베트남이 겪은 고통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인정하고 사죄 등 법적인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 어떤 전쟁에서 성폭력 피해자도 가해자도 되지 않도록 생명이 존중되고 인권이 바로 세워지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끝까지 노력할 것이다
환향녀에서 시작한 여성인권에 대한 문제제기는 현시대까지 이어진다. 전쟁상황에서 여성은 언제나 약자였다. 현재 그녀들에게 남겨진 전쟁의 상흔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남겨진 역사적 과제는 무엇인가.
전쟁 피해 생존자를 위해 정의를 구현하는 것은 도덕적 의무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현재와 미래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과거 여성에 대한 인권침해를 바로잡는다면 오늘날 여성의 상황을 개선하고, 이처럼 끔찍한 범죄가 재발되지 않도록 막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베트남 전쟁 피해자들에게도 우리 사회의 과오를 인정하고 반성해야 한다. 또한 그 힘으로 더욱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발판을 만들어 나가도록 해야 한다.
전쟁의 화마가 할퀴고 간 뒤에도 고통의 시간 속에 있는 여성들에게 이렇게 고한다. 당신들은 죄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