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6일. 지금도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그 날 아침, 나는 출근 준비를 하면서 뉴스를 보고 있었다. 인천에서 제주도로 향하던 여객선이 침몰되었다는 긴급속보가 보도되었다. 곧이어 세월호가 침몰하는 영상이 나왔다. 나는 TV 속 사고 현장을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침몰해가는 여객선 안에는 많은 탑승객이 있다고 했다. 탑승객 중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나는 고등학생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그날부터 나는 세월호 사고와 관련된 뉴스에 귀를 기울이며 떨리는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탑승객 한 명이라도 구조가 되길 간절히 바라면서.
나에게는 열한 살 어린 남동생이 있다. 당시 내 동생은 사고를 당한 단원고 학생들과 같은 또래였다. 나는 동생과 함께 부산에 있는 세월호 합동분향소를 찾았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내 동생같이 어린 고등학생들이었다.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깊은 바다에서 사고를 당했다니···. 차마, 분향소에 걸려있는 희생자들의 영정사진을 바로 볼 수가 없었다. 간신히 울음을 삼켜가며 분향소를 빠져나왔다. 그렇게 세월호 사고는 우리 모두를 충격과 슬픔에 빠뜨렸다.
세월호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길거리에서 쓰러져 있는 취객을 발견하고 경찰서에 신고를 한 적이 있었다. 내가 휴대전화로 경찰서에 신고를 하자, 정확히 3분 만에 경찰차가 신고지점까지 도착했다. 119는 또 어떤가. 직장 동료의 아버지가 방파제에서 발을 헛디뎌 추락하는 사고를 당하신 적이 있다고 했다. 다행히도 119에 신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대원들이 사고 현장에 출동했다고 한다. 덕분에 직장동료의 아버지는 신속하고 안전하게 구조되었다고 했다. 대한민국은 안전한 나라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세월호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진···.
탑승자 476명, 생존 172명, 사망·실종 304명. 이것이 세월호 사고의 결과였다. 탑승자 대부분이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나는 이 소식을 듣고서 한동안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일상생활에서도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인가. 국민소득 3만 달러, 세계 12위 경제대국, 초고속 인터넷 강국, 세계적인 자동차·반도체·조선 산업을 자랑하는 나라가 아닌가. 그러나 세월호 희생자들 앞에서 대한민국 위상을 나타내는 수많은 수식어들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에서 배의 침몰 원인을 발표했다. 무리한 화물 적재와 증축, 운전미숙 등으로 일어난 인재라는 것이다. 인재란 천재지변이 아니라 사람에 의해 일어난 안전사고라는 뜻이다. 내가 지금까지 안전하다고 믿었던 우리나라에서 이런 대형 참가가 벌어지다니 대체 뭐가 잘못된 건가.
옛날에는 이 같은 사고가 없었을까? 역사의 시곗바늘을 600년 전으로 되돌려 보자. 1403년 5월 5일 <태종실록>의 기록이다.
경상도의 조운선이 34척이 바다에 침몰되다
조운선은 세금으로 걷은 쌀을 물길로 운반하던 선박이다. 경상도에서 세금으로 걷은 쌀을 싣고 서울로 가던 배가 침몰한 것이다. 이것으로 1,000여 명의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쌀 1,500톤이 수장됐다. 사고 원인은 거센 풍랑 때인데도 운항을 강행한 데다 과적했기 때문이었다. 사고 발생 후에 올라온 상소의 내용을 살펴보자.
올해 조운선을 올릴 때 풍랑을 잘 파악하고, 화물 적재의 중량을 제대로 감독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중요한 일을 용렬하고 간사한 무리에게 맡겨 수군 수백 명을 수장시키고, 적재한 쌀 1만 여 석을 모두 물에 빠뜨렸습니다. 이로써 부모 처자가 하늘을 부르며 통곡했습니다
자질이 부족하고 무능한 선장이 날씨도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고 운항을 강행하여서 사고가 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고의 모든 책임을 선장에게만 탓할 수 있을까? 과적 또한 사고의 큰 원인이었다. 규정을 위반하면서까지 과적을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중앙권력과 결탁한 지방세력들은 자신들의 화물을 불법으로 조운선에 싣는 일이 횡횡했다. 결국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으로 인해 수많은 백성들의 목숨이 희생된 것이다. 그로부터 11년 뒤, 비슷한 사고가 일어난다.
전라도 운반선 66척이 태풍으로 파선, 2백여 명이 익사하고 미두 5800여 석이 침몰되다
이번에는 전라도에서 오던 조운선이 침몰했다. 이 사고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자.
“7월에는 웬만하면 배를 띄우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호조가 전라 수군절제사에 개 공문을 보내 ‘7월 그믐에 조운을 실어 8월 초에 올려 보내라’라고 지시했다. 문제의 인물은 수군절제사 정간이다. 정간은 이 호조의 공문대로 배를 무리하게 띄우다 참사를 빚었다.”
아... 이게 무슨 말인가. 원래 태풍이 거센 7월에는 배를 띄우지 않았다. 보통 4월쯤 배를 띄우고 5월에 한강에 도착하도록 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오늘날 기획재정부 격인 호조에서 그것을 알지 못하고 7월에 배를 띄워 쌀을 올려 보내라는 잘못된 공문을 보낸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실무진이 이 같은 잘못된 지시를 받고서도 무리하게 배를 띄워 참사를 야기했다는 내용이다. 무리한 운항으로 발생한 선박사고는 계속된다. <광해군일기> 내용이다.
조운은 마땅히 4월 초승께 배에 나누어 싣고 떠나서, 5월 안으로 경강에 도착하여 정박하는 것이 오래된 규례입니다. 그런데 조길은 청탁을 받고 7월 풍랑이 거셀 때에 강화에 이르러 1만 석을 실은 배가 전부 침몰하여 80여 명이 모두 익사했습니다. 이런 재변을 초래하고도 자기의 죄를 면하고자 도리어 압령에게 허물을 돌렸으니 파직하도록 명하소서
공무원이 조운선을 제 때에 출항시키지 않아 사고가 났다. 담당 공무원이 청탁을 받고서 4월에 보내야 할 조운선을 풍랑이 거센 7월이 되어서야 겨우 출항시켰다. 이 때문에 배가 풍랑을 만나 사고가 났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담당 공무원이었던 조길은 사고 책임을 말단 관리에게 전가하는 행태를 보인 것이다.
나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통해서, 당시 조운선 운행 과정에서 심심찮게 선박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원인은 대부분 과적과 무리한 운항으로 인한 인재였다. 세월호가 침몰한 원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쩜 예나 지금이나 대형참사의 원인이 이렇게 같을 수가 있단 말인가. 재변은 사람이 부른다고 했던가. 세월호와 버금가는 참사의 원인은 예외 없이 인재였다.
세월호 사고가 터진 지 7년이 지났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르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내 삶에서 세월호는 차츰 잊혀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조선왕조실록> 통해 알게 된 선박사고들은 세월호를 다시금 상기시켜 주었다. 이와 같은 대형참사가 일어난 후 과연 우리 사회는 얼마나 반성했을까. 사고 책임자를 처벌하고 향후 재발 방지 대책을 만들어야 된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보아야 한다.
만약 세월호가 기상악화 속에서 무리한 출항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애초에 이런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만약 세월호가 노후한 선박을 불법 증축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조금이라도 인명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세월호가 과적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배가 이렇게 쉽게 침몰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만약 세월호의 선장과 선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제 몫을 다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치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만약 세월호가, 만약 세월호가···.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역사에서 비극의 시작은 사사로운 욕심과 이기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또한 눈앞에서 부당한 일을 보고서도, ‘나 하나쯤이야’ 하는 안일한 생각들이 결국 걷잡을 수 없는 참사를 만들어 냈다는 것을 말이다. 책임을 전가하고 회피하는 태도는 언젠가 반드시 지탄의 대상이 된다는 것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절대로 이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해선 안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부터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던 지간에 깨어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자성어 중에 ‘온고지신’이란 말이 있다. 옜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 새것을 안다는 뜻이다. 우리는 과거의 잘못된 역사라 할지라도 그것을 되새기고, 반추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미래를 꿈꾸며 현재를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토대가 될 것이다.
세월호 참사, 결코 일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비극이었다. 다시는 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역사를 배워야 한다. 우리의 미래는 역사를 배우는 자의 몫이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