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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먼지 Apr 24. 2021

우울의 시대

"다 죽네, 다 죽어."


순댓국집 한쪽 구석에서 혼자 소주를 드시던 할아버지가 혀를 차며 말했다. 낡은 TV에서 자살에 관한 뉴스가 보도되고 있었다. 곧이어 분연히 소주를 들이킨 그는 외로운 죽음들을 애도하더니,  돌연 '내가...' 하며 우렁차게 우국충정을 뽐내기 시작했다. 유독 내 쪽을 바라보며 열변을 갈(喝)하셨기에 급하게 식사를 마무리해야 했지만, 보도자료 속의 출렁이는 그래프는 하루 종일 눈에 어렴풋이 남았다.


바야흐로 우울증의 시대였다. OECD 어쩌고를 운운하는 통계의 제시 같은 건 이제 별다른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어차피 부동의 1위는 변함이 없으니까. 20대와 30대에게 가장 흔한 죽음은 스스로를 살해하는 것이다. 무려 이런 것을 무슨 한여름 비 소식처럼 무덤덤하게 얘기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우울증 같은 정서 기능의 오류가 이렇게 흔할 일인가? 날이 추우면 감기에 들듯이 마음에 감기가 걸리는 게 우울증이라던데, 감기도 이렇게 빈번하고 치명적이면 펜데믹이다. 무슨 빙하기도 아니고 말이다. 나는 뉴스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강박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자극들에 반복 노출돼 무감각해지는 것도 싫고, 개별적인 죽음을 물화(物化)시키는 타자화된 시선도 왠지 섬찟하다.


작년 한 해 동안 13,799명의 사람이 저자신을 죽였다고 했다. 일만삼천칠백구십구, 그 구체적인 숫자는 사람의 목숨이었다. 2D 그래픽으로 물화된 13,799개의 목숨은 집단적이고 공식적인 죽음이었지만, 그 건조한 보도에 개별적인 죽음은 느껴지지 않았다. 행정당국에 의해 매년 갱신되는 집단적 몰살의 해결책은 개별적 목숨을 구하지 못했다. 집단과 개별은 단절되어 있었다.


사실 우리 사회의 집단적 우울은 이미 수많은 각계각층 분들(애국지사 할아버지를 포함해)에 의해 분석이 시도되었다. 심해져가는 빈부의 간극 때문이라고 하고, 극악한 취업률 때문이라고도 하고, 개인주의와 탈가족화 때문이라고도 하고, 한국 특유의 정신문화 때문이라고도 했다. 심지어는 인터넷 게임이나 나약한 정신력 탓이라고도 한다. 물론 그 모든 것들은 단독 할 수 없었고, 또 개별의 죽음에 타당한 연유가 될 수도 없었다.


두려움과 불안은 다르고, 슬픔과 우울도 다른 것이다. 삶의 어떤 고난들과 스스로 행하는 살인 역시 직결되지 않는 것이었다. 두려움은 어떤 대상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감정적 현상이지만, 불안은 어떠한 대상도 없기 때문에 존재하는 본질이다. 슬픔은 자아와 세상의 대립에서 비롯된 현상이지만, 우울은 자아가 실종된 세상의 아득한 공허감이다.


두려움과 슬픔, 그리고 그것들의 발현지인 일련의 사건들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물성이 있다. 그래서 싸울 수 있고 극복될 수 있다. 가난과 취업, 고압적인 사회문화 같은 것은 손에 잡히는 적이고, 그렇기에 싸울 수 있는 대상이다. 결핍은 삶의 동기이자 목표가 될지언정 스스로를 살인케 하는 이유는 결코 될 수 없는 것이다.


집단적 죽음을 타자적 시선으로 물화했을 때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고, 손에 잡히는 당위적 인과를 끊어내면 해결될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개별적 죽음은 사건이 될 수 없고, 단지 최종적 종말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사람에게 왜 그러냐고 물어봐도 소용이 없다. 그의 죽음에는 손에 잡히는 이유가 없다. 그는 자아를 말살하려는 것이 아니고, 아득한 무의미와 실재하는 존재 사이의 부정교합을 견디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으로써 내가 살아오면서 느낀 것이 있다면, 어떤 공식적인 교육과정이나 사회의 전체적인 시스템 저변에 흐르는 무언의 합의 같은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합목적적이며, 지금 너희에게 주어진 자유라는 것은, 일반 규칙이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을 계산해 내기 위한 성질이라는.


그러나 사실,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그런 일반 규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무목적적이고, 필연과 당위 같은 건 없으며, 지극히 우발적이고 얼렁뚱땅하다. 인간의 뇌는 목적이 없는 것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이는 우리의 직관이나 욕구와는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수천 년간 포식자 식별이나 열매 채집만 하면 충분했던 기관인데, 단기간에 이 정도 발전해준 것만으로 감지덕지 아니겠는가.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 교수는 동저에서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질병이 있다"고 했다. 지금 이 시대의 도드라진 질병은 극단적 성과중심주의와 그에 따른 피로감이며, 현대인은 피해자 동시에 가해자인 자폐적 성과 기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13,799개의 개별적 죽음은 시대적 질병의 가장 극단적인 증상인 셈이다.


극단적 성과중심주의는 집단의 병이지만, 그에 따라 본인이 직접 자기 착취의 감시자가 되는 것은 개별의 문제다. 우리 사회의 모든 시스템은 어떤 '무언가'를 쫓아야 한다는 경쟁심과 투기를 미덕으로 여기지만,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비단 자본주의적인 물질적 성과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긍정적 테제라고 여겨지는 꿈이나 행복, 자아실현 같은 것들도 자기 착취의 광물이 되기는 충분하다.


철학자도, 심리학자도 아닌 나는 시대에 진단을 내리거나 사회적 문제에 해결책을 도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떤 유용한 민간요법 같이, 개인적 경험에 따른 결괏값이라면 나름은 있다. 삶의 무목적성을 깨닫는다는 것은, 어떤 허무주의나 패배적인 자세를 견지하라는 것과 다르다. 마치 공을 쫓는 강아지처럼, 맹목적 충동에 따라 '무언가'를 쫓는 행위를 멈춰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아득한 무의미와 살아 숨 쉬는 나 사이의 간극이 파괴적인 종말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모든 생명 행위에는 반드시 이유와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감전된 젤리의 맹목적 결론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는 충분히 잘,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아니, 그렇지 않아야지 자유롭고 평온하게 살 수 있다.


무의미와 공허를 품은 우리를, 세상을 둘러싼 무의미를 인정하는 순간, 아마도 나를 둘러싼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애정을 느끼게 될 것이다. 작은 뇌가 지배하는 작은 생명인 우리는, 사랑이 없이는 그 광대한 무의미함을 견딜 수 없다.

 

내가 좋아하는, 그리고 싫어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말도 안 될 정도로 지극한 억겁의 우연으로 이루어진 것 아닌가. 사람의 지성과 육체는 우리의 유일한 집이다. 그 유일한 집이 억겁과 억겁의 우연성으로 나에게 주어진 것이다.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내게 신이란 우주만물에 대한 나의 경외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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