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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먼지 Apr 30. 2021

투기의 전성시대

2021년 시대의 화두는 단연코 투자였다.  또래 청년들이 모이는 그 어느 곳을 가도 주식과 비트코인 이야기가 없는 곳이 없다. 화자의 연령이 좀 올라가면 거기에 주택청약과 부동산 정도가 추가된다. 뉴스와 신문에서는 연일 무언가의 폭등이나 폭락 현황을 중계하고 있었다. 가끔 SNS에 올라오는 무슨 코인의 등락 그래프는 태백산맥 저리 가라다. 최근 논란이 많았던 가상 화폐 '도지 코인'은 해외 유명 기업인의 트윗 한 번에 가치의 30~40%를 얻고 잃는다. 이 정도면 국내의 산간지방으로는 안된다. 얀데스 내지는 히말라야 정도는 나와야 급이 맞다.

   

주식 안 하면 바보고 영끌 안 하면 겁쟁이다. 이해한다. '깨어있는 금융 시민'이 되지 않으면 정부와 은행에 부를 갈취당한다고 한다. 최근까지 연일 계속되었던 기축통화의 양적완화를 보면, 완화보다는 '살포'나 '폭격'같은 수식어가 붙어야 할 것 같지만, 화폐의 가치 상실은 가히 살인적이었다. 그 상실감과 배신감도 백번 이해할만하다.


거기다 권력층의 비도덕적 재산 축적 사건이나 LH 사태 같은 완전 부패가 매일 같이 목격되니, 어쩌면 지금의 강박증적인 물신 숭배 풍토는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평생을 열심히 일해도 집 하나 마련하기 힘든 세상 아닌가?


최근 경찰에서는 비트코인이나 주식과 관련된 커뮤니티에 '마포대교'같은 키워드를 모니터링하고 , 등장 빈도가 많아지면 한강의 순찰을 강화한다고 한다. 이 정도면 이 사회적인 병리 현상도 중증 이상은 갔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미국 중심 금융 체제의 허구성이나 취약성은 사실 닉슨이 '배 째라'며 정하게 금 본위제를 폐기했던 1972년에 공공연하게 확증된 거나 다름없다. 그 후에 50년 동안 잠들어있던 금융 시민들이 최근 뜬금없이 동면을 끝낸 이유가 무엇일까?


사람의 심리기제는 뇌보다는 몸에 더 가깝게 작동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람들은 월 스트리트의 '울프'들이 천문학적인 돈을 빨아들일 때보다 옆 자리 김대리가 코인 도박에 성공했을 때 더 화가 난다는 뜻이다. 지금 노이로제 적인 투자 열풍은 자본주의와 화폐에 대한 칼 같은 진단과 계산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 그것의 모체는 상실감과 분노다. 


우리나라가 폭발적인 경제성장과 함께 다 같이 벌 때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자기 착취와 맹목적인 물신 추구가 실질적인 보상으로 돌아올 때는 모든 게 잘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부모보다 가난한 최초의 세대가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홀로 서기 시작했을 때, 부모의 전략이 더 이상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누군가는 벌고 누군가는 그렇지 못하게 됐을 때, 그들은 길을 잃었다.

 

비교우위에 대한 욕망과 부에 대한 괴리된 상실감은 금융이라는 날개를 달고 모든 것을 집어삼킨 것이다. 그것은 결코 냉정한 자본주의적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도박의 성공 여부와는 아무 상관없이 말이다.

 

현재의 금융제도나 자산 투자가 송두리째 잘못돼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의 꽃은 투자시장이라고 하지 않나? 단지 영혼까지 끌어들이는 건 투자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투자는 리스크와 리턴에 대한 계산에 기초했을 때만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영혼 같은 것이 저울에 올라간 순간 그것은 투자가 아니다.  메피스토는 파우스트에게 확정적 확률이라도 제공했지, 비트코인은 잘 쳐줘야 50% 확률의 홀짝 도박에 불과하지 않은가. 악마보다 못한 거래조건이라 할 수 있겠다.




나는 돈이 그렇게까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돈만 한 것이 없다거나, 돈이 있다고 무조건 행복한 건 아니지만- 없으면 무조건 불행하다거나 하는 식의 21년식 속담에도 난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이런 말을 할 때면 늘 '아직 세상 안 살아봤네'하는 식의 멸시와 조롱감당해야 했지만, 그럼에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다. 돈 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돈은 아무것도 아니다.  기껏 해봐야 조개껍질보다 가볍고 보관에 용이한 그림 종이에 불과하다. 그마저도 아니면 서버에 저장된 실체없는 데이터다. 그것은 어떤 가치도 아니고, 단지 교환수단이다. 돈은 무언가와 교환됐을 때만 존재 이유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즉 돈을 열망하는 모든 사람들은 사실 돈을 열망하는 것이 아니라 돈과 교환될 어떤 가치를 열망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BMW를 사고 싶은 박 대리도, 반포에 아파트를 분양받고 싶은 이 과장도, 사실 잘빠진 외제차나 한강 뷰 아파트를 가지고 싶은 것이 아니다.

 

미혼인 박 대리가 원하는 것은 BMW에서 내리는 본인을 바라보는 애정 어린 눈빛이다. 중년의 이 과장이 가지고자 하는 것은 떠나간 청춘의 자리를 채워줄 사회적 위신과 체통이다. 한강뷰 아파트가 아니고 말이다. 물질적 가치는 단지 표상이다. 그 이면은 언제나 결핍과 갈망이 있다. 프로이트 적으로 말하자면, 박 대리의 BMW는 위장된 욕망인 것이다.


이 위장은 너무나 강력하고 장황한 나머지, 스스로 일말의 의심도 없게 만들어 버린다.  욕망에서 위장으로, 위장에서 화폐로, 화폐에서 다시 욕망으로 진행되는 복잡한 도식 앞에 이성은 쉽게 매몰된다. 이미 도식에 매몰되어 버린 개인이 거꾸로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찾아 나오는 과정은 참으로 힘겹다. 원래 리버스 엔지니어링이 훨씬 어려운 법이다.


욕망의 동기는 언제나 결핍이다. 동기가 없는 행동은 있을 수 없고, 결핍이 없는 동기는 있을 수 없다. 이 도식을 번역하자면 반포 아파트의 동기는 위신이고, 위신을 원하는 이유는 자아존중감의 부재다. 사실 이 과장의 행복은 단순했다. 아내에게 사랑받고, 자식들에게 존중받으면 충분했 것이다. 족에게 사랑받는 것만큼 충만하게 존중감을 채워줄 수 있는 건 없다. 그러나 반포 아파트를 위해 미친 듯이 잔업과 야근을 하는 남자는 좋은 남편도 멋진 아버지도 되기 힘들다. 진짜 결핍과 위장된 열망의 주객전도는 결국은 '마포대교'같은 병리 현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위장된 갈망과 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해묵은 교훈 같은걸 꺼내려는 게 아니라, 그냥 상식적으로 충족될 수 없다. 라캉이 말했듯, 욕망은 실현될 수 없으니까 욕망인 것이다. 실현된다면 그것은 욕망이 아니니까. 진짜로 갈증이 나는 건 따로 있는데, 신기루만 쫓아다니는 셈이다. 영화 <올 더 머니> 속의 냉혹한 거부 J. 폴 게티는 얼마나 더 벌어야지 만족할 거냐는 질문에 답한다. "MORE!" 이것이 위장된 욕망의 필연적 속성이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어떤 신박한 투자상품으로 돈을 벌기에 앞서서 생각되어야 하는 것은 위장된 욕망을 해체하는 것이다.  아마 '안정감' 이라던지 '존중감' 같은 모호한 느낌만이 머릿속을 떠다닐 것이다. 괜찮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끊임없이 솔직해지려는 태도가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그것이 결국은 행복을 찾아가는 길이고,  진짜 '나'를 만들어가는 작업의 시작인 셈이다. 


얼마전 우연히 미디어에 등장한 '멘토'가 하는 조언을 들은 적이 있다. 젊은 나이에 차를 사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고, 카페에서 커피를 사 먹는 것도 바보 같은 짓이고, 필요 없는 것에 돈을 쓰는 그 모든 게 바보 같은 짓이라 했다. 그는 그 돈으로 주식을 사야 하며, 돈이 들어오는 '파이프'를 끊임없이 다각화하고 확대해야 노동계급을 벗어날 수 있다고 준엄하게 꾸짖었다.


무지한 나는 정말로 모르겠다. 아무것과도 교환되지 않을 화폐는 어떤 가치가 있는가? 또, 아무것과도 교환되지 않을 것들을 위해 사라진 청춘의 시간은 어떤 가치를 갖는가? 무지개를 쫓는 강아지처럼, 손에 닿을 수 없는 것을 쫓아 평생을 걷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개인적으로, 나에게는 수백억을 준다고 해도 팔지 않을 것들이 수두룩하게 많다. 정말 힘들던 시절에 읽었던 <데미안>, 그리고 니체와 프로이트-. 음 영화를 찍었던 순간, 또 처음으로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을 때. 온 세상의 금은보화를 다 준다 해도 그 충만했던 순간을 포기할 생각이 나에겐 전혀 없다. 첫 단편영화의 예산마련을 위해 두 달 동안 쉬지 않고 열다섯 시간을 일했다. 그리고 그 돈은 단 삼일 만에 전부 소진됐다. 금전적 이득은 전무했고, 심지어 결과물 자체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나는 그때만큼 실재적으로 '산다'는 것을 감각한 적은 없었다.


26살의 내가 내린 잠정적 결론에 따르면, 모든 존재의 본질적인 결핍은 실존적 불안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불안을 달랠 수 있는 건 '산다'는 행위의 순수한 이행에 있다. 따라서, 밤하늘의 별이니 봄에 피는 꽃이니 옆에 있는 사람이니 하는 상투적인 것들보다 중요한 건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다.


니체는 말했다. "춤을 추는 사람은 미친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음악이 들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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