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날

추억할 거리 하나쯤은 만들어주면 좋겠는데,

by 서리달

해야만 하는 일을 미루고 미루다

하지 않으면 언젠가 나쁜 일이 되는 듯해.


어렸을 때 알게 된 하나야. 미루고 미루다가 산처럼 쌓인 숙제들 덕분에 알게 된 하나야. 숙제 그 자체는 나쁜 일이 아니지. 그냥 주어진 일이었을 뿐, 할 수 있을 때 했다면 흔하고 흔한 지나가는 일이 될 수 있었겠지.


하지만 미뤘다면, 덧붙여서 하지 않았다면 끝끝내 '나쁜 일'이 돼버리는 거야. 높다란 산처럼 쌓인 숙제들을 짧은 시간에 해내야만 한다는 압박감이라든가 불안감이 그렇겠네. 게다가 해내지 못하면 하등 쓸모없을 비교에 시달리거나 돌림노래만 같은 꾸중을 듣거나, 경험을 되짚어 생각해 보면 천둥을 빼닮은 언성에 혼쭐도 나겠지. 상황에 따라서는 얇고 얇은 눈길의 구경거리가 되고, 이어서 '반성'이라는 이름으로 더 얹어진 숙제들이 더 높이 쌓이겠지.


그리 어려울 것도 거창할 것도 없을 숙제조차 미루고 미루면 나쁜 일로 돌아오는 것 같더라고. 책에서나 읽었던 '인과응보'가 이런 걸까 했었던, 어렸던 날의 어느 늦은 밤이 떠오르네. 지금이니까 헛웃음이라도 지으면서 돌아볼 수 있지. 그땐 어찌나 기분 나쁘고 재수 없는 일만 같았던지.


그렇게 어린 밤의 졸음으로

배웠던 사실 하나.

해야만 하는 일을 미루고 미루다

하지 않으면 나쁜 일이 된다.


그러고 보면 이건 꽤 써먹을 데가 많아. 지금 우리에게도 써먹기 좋을 만큼 아주 쓸모 있는 사실이야. 늘 좋은 게 좋은 거란 식으로 굴러가는 당신이 납득해 주겠는지 모르겠지만, 차라리 시답잖은 변명이라며 비웃어주면 내 마음이 좀 편할 것 같기도 하네.


다른 놈이라도 생겼냐며 의심해도 괜찮고, 어느 쪽으로 어떻게 해석해서 어떤 말을 하든 간에 묵묵히 들을 준비 정돈 했으니까 괜찮아. 이제는 작년이라고 불러야만 할 초여름의 어떤 날. 그때 하려던 말을 미루고 미루다가 괜한 기대를 걸며 삼켰던 말을 이제야 꺼내는 건데_ 당신이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말을 한다 해도 가만히 있을게. 아, 음, 어차피 그럴 당신이 아니란 것쯤은 잘 아는데, 그래도 욕은 하진 말았으면 좋겠네.


어차피 끝나는 마당에 뭐든

괜찮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욕은 싫거든.


근데 있잖아, 솔직히 말하면 좋은 게 좋은 거란 식으로 굴러가는 당신답게 편하게 보내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어. 그럼 적어도 마주한 지금이 나쁜 일, 나쁜 날이 되진 않을 것도 같거든. 우리의 어제들을 얼마만치 미화해보려고 애써봤자, 마냥 좋았던 날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만 같은데 이별마저 나쁜 일. 나쁜 날로 마무리된다면 추억할 거리가 너무 없잖아. 추억할 거리 하나쯤은 만들어주면 좋겠는데_ 아, 음, 이런 바람은 너무 이기적인 걸까.


여전히 내려놓을 게 많네.

당신 앞에 나는:


-있잖아, 계속, 계속 생각해 봤는데.


당신의 침묵

상냥함과는 결이 다른

옅은 미소.


-우리 둘, 정말 안 맞는 거 같지?


여전한 당신의 침묵 그리고

여느 때와 다르게 섬세한 포옹 3초 남짓.


썩 진한 적 없이 잔잔하기만 했던 당신만의 내음이 어깨부터 허리까지 내려앉았어. 좀 전까지 못 봤는데 지금 보니까 면도도 깔끔히 했네. 늘 상처가 많았던 얼굴이었던 것 같은데 말이야. 이런 나쁜 날, 이런 끄트머리에서야 오랜만에 만난 설레던 하루의 당신.


또 미뤄버릴 것처럼

자꾸만 안으로 굽어지는 마음.


그럼에도 눈 마주친 채로 처음처럼

손 맞잡은 채로 주고받는 한숨 한 번, 두 번

이어서 다음은:



_2021.12.07作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