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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 mark Apr 18. 2021

 '갬성'은 죄가 없다.

 얼마 전에 인터넷으로 주문한 핸드드립 세트가 도착을 했다. 독일 아마존에서는 금액대가 꽤 센 것 같아서 비슷한 제품으로 보이는 세트를 거의 반 가격에 알리익스프레스에서 주문했다. 분명 10일 내 도착이라서 주문했지만, 받는데 몇 주가 걸린 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또 택배 기사님이 분명 우체국에 이 택배를 맡겼다는 데, 우체국 한 직원분은 없다고 하셔서 세 번째에 찾아가서 결국 다른 직원분에게 받는, 아주 기분 좋지 않은 과정을 거쳤지만. (아저씨, 어차피 이 글은 못 읽으시겠지만, 무조건 없다고 하지 마시고 다음에는 제대로 찾는 시늉이라도 좀 해주십쇼!)

 그래도 드디어 집에 도착했고, 제품도 맘에 들었다. 구성은 이러했다.


 집에 있는 '웡웡' 소리에 내 고막도 갈아버릴 것 같은 전동 그라인더를 대신할, 세밀하게 굵기까지 조정할 수 있는 수동 그라인더, 뜨거운 물을 적정량, 적당한 높이에서 적정 속도로 부어 내릴 수 있는 드립 팟, 세라믹은 아니지만 적당한 예쁨을 지닌 유리 드리퍼와 종이필터, 그 모든 커피를 받아 낼 내구성과 열에 강하다는 투명 서버에 이과美를 더해 줄 전자저울까지. 크으. 받고 뜯어보면서 막 전문가 된 거 같고 그랬더랬다.


 유튜브에서 이런저런 영상까지 찾아보면서 커피를 몇 잔씩이나 내려보고, 마셔보고 버려가면서 몇 잔을 내려보니 드디어 마실만한 커피를 내릴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문제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뭐 그런 사소한 '불편함'들이 보였다.

 수동 그라인더로 커피를 갈아 내며, 다행히 내 고막은 안전해졌지만 팔꿈치 연골은 조금씩 갈리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더디고, 부드럽게 갈리지 않는 수동 그라인더를 갈다가 결국에는 조금 시끄럽지만 버튼 한 번 눌러주면 제 할 일을 해내 주는 기특한 전동 그라인더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 몇 잔을 내려보며 느낀 건데, 내가 커피를 잘 내리고 있는 것인지 의구심이 자꾸 들었다. 커피 그라인딩 한 굵기부터 시작해서, 커피에 물을 부어 뜸 들이기는 너무 길지 않게 한 게 맞는지, 다행히 저울이 있기에 물이 많고 적고는 알 수 있는데 내가 맞는 위치에 물을 붓고 있는지 의심이 들었다.

 그리고 커피 한잔을 먹는 데 이 모든 과정을 거치는 건 시간이 들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그 시간을 거친 뒤에 맛보는 커피가 캡슐 커피머신이 내려주는 커피보다 맛있는 가에 대해 칼같이 '그렇다'라고 얘기할 수가 없었다.

 아, 물론 둘 사이의 커피맛은 아주 달랐다. 나는 아주 시다고 느껴질 만큼 산미 있는 커피를 좋아하기 때문에 핸드드립 커피가 입맛에 맞기는 했지만, 한국에서 아주 맛있다고 느껴지던 산미 있는 커피(예를 들면, 이태원의 챔프 커피의 아이스 아메리카노. 정말 사랑한다.)의 느낌은 나지 않았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나는 후회하고 있는가, 혹은 앞으로 그럼 그냥 캡슐 커피 마실 생각인가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또 그렇지는 않다는 답을 할 것 같다. 사실 내가 이 핸드드립 세트를 주문할 때 나의 의도는 커피를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내릴까 가 아니었다. 나는 단지 그 커피를 갈아내고, 내리는 과정에서의 '갬성'을 바랐던 것이다.

 책 '상관없는 거 아닌가?'에서 장기하 씨는 이렇게 말한다.

"기분 탓이야." 이 표현이 널리 쓰이고 있다는 것은, 아마도 많은 이들이 이 '기분'을 좀 하찮게 여기고 있다는 뜻일 터다.... 스스로의 기분이 어떤지를 잘 살피는 일이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여긴다.
- 장기하 "상관없는 거 아닌가" 중 에서 -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가 감성을 찾는 이유는 다른 이유가 아니다. 그냥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이 그 이유다. 딱히 효율이 좋다거나, 어떤 효과를 내는 것이 아니라 내 기분이 좋아지는 행위인 것이다. 다소 불편하거나 시간이 더디더라도 내 기분이 좋아진다면 충분히 감성을 찾을만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원두 콩이 담긴 봉지를 열어서, 적당량 꺼내서 슬슬 갈아내면서 그 새에 물을 끓여내고, 물이 다 끓으면 먼저 서버와 마실 커피잔에 부어 따뜻하게 데운다. 드리퍼에 잘 정리한 종이 필터를 올리고 다시 뜨거운 물을 부어내어 혹시라도 스며들 수 있는 종이 냄새를 지운다. 서버가 잘 데워졌으면 물을 버리고 갈아낸 20g의 커피가루를 필터 위에 소복이 잘 담아내고 탕탕 쳐서 표면을 고르게 만들어 준다. 그다음 40g의 물을 부어 1분간 커피가루에 뜸 들인다. 그리고는 80g의 물을 가운데에 잘 부어내고 다시 1분, 다음은 40g의 물을 붓고 40초 뒤 드리퍼를 치운다. 잔에 담긴 물은 비워내고 서버에 내려진 커피를 잔에 붓고는 진하게 마시고 싶으면 물을 조금, 조금 연하게 마시고 싶으면 물을 많이, 내 '기분에 따라' 더한다. 그렇게 한 모금을 마시면 시큼하고 씁쓸한 맛이 먼저 와 닿는다.


 음. 나의 감성은 이렇게 오늘 또 나를 '방구석 바리스타'로 만들어주었다. '갬성'은 죄가 없다. 갬성이 나를 기분 좋게 해주기만 한다면. 다 쓰고 나니 내가 내린 커피를 마시고 싶어 졌다. 캡슐 커피로 내린 라테 한잔을 이미 글을 쓰며 마셨지만. 지금 내 '기분'이 커피를 내리고 싶은 기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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