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부터는 전화 길게 끌고 있을 필요 없이 그냥 끊어도 될 것 같아. 받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둘 다 스트레스잖아."
오늘 저녁, 본가로부터 전화가 왔다. 얼마 전 보내 준 고기에 대한 감사 인사나 하면서 가볍게 안부나 물으려 했는데 부친은 엉뚱하게도 명절 선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설이나 추석에 보낸 명절 선물을 할머니가 탐탁지 않아 한다는 내용의. 부친과 모친이 번갈아가며 '내 생각에는 ~'하고 꺼내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려니 피로가 몰려왔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거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대충 '예, 네'하고 무의미한 이야기가 계속 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도 휴대폰 배터리가 1퍼센트밖에 남지 않아 통화는 어영부영 종료되었다. 그리고 통화가 끝나자마자 남편은 툭 한 마디 뱉었다. 통화를 효율적으로 해야지, 할 말만 딱 하고 끊고. 내가 통화를 비효율적으로 질질 끌었다는 이야기인가 싶어 기분이 조금 상했지만 짐짓 유쾌하게 대꾸했다.
"그러게. 나는 왜 전화를 먼저 못 끊을까?"
이야기를 끝내고 싶어 던진 말이었는데 남편은 속도 모르고 "그러게.. 이것도 수동 공격성인가?"라고 답했고 나는 쓸데없는 전화 속 부모의 말을 듣고 있을 때보다 더더욱 피로해졌다.
눈치가 빠르지만 사회성이 없는 사람. 학창 시절의 나를 정의하자면 그런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부친의 기분에 맞추기 위해 눈치를 보던 것이 습관이 되어 나는 어디에서든 눈치를 보았다. 눈빛, 숨소리, 목소리의 미세한 떨림은 내게 너무 크고 선명한 것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그런 변화는 내게 파도처럼 밀려드는 것이었기에 나는 저항도 못한 채 받아들여야 했다. 보고 싶지 않아도 보이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그렇게 항상 눈치를 보면서도 사회성이 너무나 부족해서 나는 오히려 터프한 척 행동했다. 눈치를 보는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눈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주변 아이들은 내가 욕을 하며 거칠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무섭다'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그렇게 눈치를 지나치게 살피는 내가 가장 어려워하는 것은 '이야기를 끝내는 것'이었다. 어떤 대화를 시작하는 것 자체도 어려웠지만 시작된 대화를 어떤 식으로 끝맺어야할지를 몰랐다. 언제 대화를 끝내는게 적절한거지? 어떻게 대화를 마무리해야 상대방의 기분이 상하지 않고 즐겁게 끝낼 수 있지? 생각이 많은 나에게 대화는 때로는 너무 길고 때로는 너무 짧았다. 상대방의 말을 중간에 끊지 못해 일면식도 없는 보험 전화를 내내 듣고 있기도, 대화를 시작하는 것 자체가 두려워 상대방을 못본척 지나친 적도 많았다. 상대가 가까운 사람일수록 대화는 어렵게 느껴졌고 적절하게 거절하지 못해 기진맥진해진 적도 잦았다.
특히 어려운 것은 연인이나 부모처럼 가까운 사람의 전화를 받는 것이었다.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상황에서 대화의 타이밍을 재는 것은 더 힘들었다. 나는 억양이나 말투, 목소리의 높낮이만으로 상대의 감정을 알아내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덕분에 정작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하지 못하고 상대방의 말의 내용에도 집중하지 못한 채 무신경한 리액션 로봇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 내가 하는 생각은 오직 '얼른 이 전화를 끝내줬으면 좋겠다'라는 것뿐이었다. 전화로 이야기하는 5분, 10분은 영겁의 시간과도 같았다. 이 타이밍에 끊으면 부모가 서운해할까봐, 연인이 속상해할까봐 의미 없는 대화는 그대로 질질 이어졌다.
30대에 들어서면서 남의 눈치를 덜 보자고 다짐한게 엊그제 같은데, 또 어느샌가 도돌이표를 연주하고 있는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져 우울해졌다. 그러다가 오늘 SNS에서 본 글 하나가 떠올랐다.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교감 신경이 매우 발달해 다른 사람에 비해 훨씬 예민한 상태로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교감 신경이 발달된 사람은 일상적인 상태를 비상 상황으로 받아들인다고. 그래서 작은 자극에도 보통 사람에 비해 조금 더 감정적으로 반응한다는 이야기였다. 환경의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그냥 체질적으로 그렇게 타고 난 사람이 있다고 한다. 오늘 겪었던 일련의 사건과 SNS의 글이 합쳐지며 우울했던 마음이 조금은 정리가 되었다.
두 달 정도 되는 기간 동안 글을 쓰지 않았던 것은 딱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어서였다. 하지만 오늘은 글로나마 시끄럽게 얘기하고 싶었다. 내가 전화를 먼저 끊지 못하는 사람인 것은 딱히 나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그냥 세상에는 나 같은 사람이 있고 그런 사람들이 너무 자책하지 않기를 바라며, 스스로 글을 쓰면서 마음을 위로하고 싶었다. 오랜만에 쓰는 글이라 다소 두서 없는 글이 되었지만 어쨌거나, 전화를 끊지 못하는 사람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