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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유 Jul 28. 2021

싫은 네 모습에서 내가 보여

  가끔 내가 전생에 어떤 사람이었을까 생각한다. 대학 동창의 표현을 빌리자면 “네가 말을 할 때마다 입에서 벚꽃이 날리는 것 같았어.” 웃긴 말일지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해도 그때 난 여린 꽃잎처럼 가녀렸다. (지금은 딱 반대일지라도) 근데 그때도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와는 달리 내 글은 어딘가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구석이 있다는 평가를 받곤 했다. 


  사람들이 외면하는 밑바닥 인생이나 인간 이면의 선과 악의 동시성 같은 걸 자주 쓰고 싶었다. 마치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토마시처럼. 안개가 자욱한 무거운 사랑과 깃털처럼 가벼운 사랑과 존재의 모순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 말이다. 나는 왜 그토록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게 좋았을까. 아름다운 이야기들만 가득 채우기에도 모자란 시간이었을 텐데.


  내 글쓰기를 정말 싫어했던 소설 창작 과목의 어느 교수는 수업시간에 나를 동기들 앞에 세워놓고 두어 시간 동안이나 내 글이 마음에 들지 않은 이유를 일장 연설한 적이 있었다.  꼬박 두 시간 동안 열정적이게 내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마지막으로 던진 교수의 말은 이러했다. 


  “네 글은 무라카미 하루키나 J.D 샐린저처럼 염세적이고 자조적이야. 나는 그런 글쓰기가 정말 싫다. 세계적인 수상 작가든 뭐든 그게 뭐가 중요하니. 그런 글쓰기는 마스터베이션에 불과해. 근데 이번 수업에 제출한 학생들의 글 중에서 유일하게 하고 싶은 말이 정확한 글이긴 하다. 그거 하나는 인정해주마.” 


  나는 스무 살에 그 교수의 말을 듣고 일 년 동안이나 소설을 쓰지 않았다. 소설을 쓴다는 상상만 하면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마구 뛰었다. 오늘은 책상 위에 노란색 포스트잇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한 달 전부터 같은 자리에 붙어있는 메모지에는 세 명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있다. 이건 데스노트도 아니고, 투 두 리스트나 버킷리스트 같은 것도 아닌데 미해결 과제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 달째 붙어있다. 어느 정도 인생이 살만하다고 느끼고 나서부터 머릿속에서 자꾸 맴도는 세 명의 지인이 있다. 오래전 각자의 이유로 연락이 끊겼는데 그들의 이름과 핸드폰 번호를 써놓은 포스트잇이다. 


  살다 보면 찢어지게 마음이 힘든 순간이 있다. 때는 다르게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온다. 고백하자면 포스트잇에 적힌 세 명은 딱 그맘때 말 한마디로 내게 약간의 원한을 샀던 사람들이다. 사람이 마음이 힘들면 본의 아니게 쪼잔 해져서 별 것도 아닌 말에 꽂혀 오래도록 미워하는 마음을 품기도 한다. 세 명 모두 각자의 방향대로 내가 아끼던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 세 명의 또 다른 공통점은 내가 사랑, 돈, 직장을 모두 잃고 인생의 난항을 겪을 때 나의 가능성을 재단하는 말을 던졌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파혼하고 직장을 구하지 못한 채 공기 중에 부유하던 내게 “한 번 중심을 잃으면 계속해서 힘들더라. 때 놓치니깐 마음 맞는 사람 찾기도 힘들고 하는 일도 그만두니깐 진로도 더 애매해지고. 내 주변에 너 같은 누나 있는데 계속 힘들어져.”라고 얘기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다소 속물적인 지인 얘기로 열중하며 내게 입을 연 적이 있었다. 내가 듣기엔 속물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순진한 쪽에 가까운 듯 보여서 그 사람 꽤 흥미로운데?라고 반응을 보이자 그녀는 반사적으로 내게 이렇게 말했었다. “그래도 그 오빠 직업도 확실하고 연봉도 높아서 아무 여자나 소개 못 시켜주지.” 노란색 포스트잇에 적힌 마지막 명단의 한 지인은 내가 언젠가는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나서 사랑하고 싶다고 하자 이렇게 말했었다. “스스로도 알잖아요. 누군가와 함께하는 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 


  나는 그들에게 서운한 마음을 오래도록 간직해왔었다. 때때로 맥주 한 잔 하며 생각에 잠기는 날이면 그들의 말이 콕 박힌 가시처럼 심장을 찔러 시큰댔다. 술에 취해서는 꼭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느냐고 혼자 중얼거리는 날도 있었던 것 같다. 어쩐 일인지 얼마 전부터 그들이 생각난다. 왜 나는 그때 그 말이 그렇게 서운하다고 툭 터놓고 말조차 못 했을까. 그대들을 잃기 싫은 마음보다 내가 받은 상처가 더 크고 아팠던 걸지도 모르겠다. 이제 더 이상 그들의 말이 아리게 다가오지 않는다. 내 인생에 그저 하나의 작은 문학적 해프닝처럼 우발적인 서사에 불과하니깐.


  시간이 많이 지나서일까. 아니면 그토록 아리게 박혔던 그들의 말 한마디가 사실은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했던 내 마음의 말을 그대로 투영시켜서 더 시리게 아팠다는 걸 알아서일까.  싫은 당신의 말과 그 얼굴이 나의 어두운 그림자를 투사했던 거겠지. 내가 들은 당신의 말과 싫은 모습이, 사실은 내가 날 사랑하지 않는 내면의 얼굴을 들킨 거라는 걸 이젠 인정해서일까. 그들의 말 한마디보다 그들과 함께 했던 자잘한 추억들이 더 아련하게 남아있는 오늘이다. 고작 스무 살짜리 문학도에게 그렇게까지 심하게 말했던 교수는 사실은 가난한 문학가 대신 안정적인 직업을 선택한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을 거다. 사랑하지 못한 마음을 내게 투사했던 거겠지. 


  그 누구도 나의 가능성을 믿어주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땐 내가 나를 온전히 믿어주고 안아주라는 절호의 기회다. 껍데기의 나 말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오롯이 안아줘야 한다는 신이 준 찬스 같은 것. 조만간 그들에게 안부를 물어야겠다. 잘 지냈냐고. 당신의 안부가 궁금했다고. 작고 소소한 추억을 만들어줬던 당신들의 안부가 참 궁금했다고 말이다.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면서도 이렇게 글을 남기는 나는 아마도 전생에 용서라고는 모르는 꼬장꼬장한 선비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도 이젠 당신의 싫은 모습이나 내게 툭 던진 그 말 한마디들이 거슬리지 않은 걸 보면 내가 나를 더 사랑하게 되었나보다. 기분이 좋다. 



- 사진 출처 : 

YOUTH ARTIST EXHIBITION #10 LIMINALITY 2021.07.02~07.30, Jeah Hyuck  

@JEAHHYUCK

@JEAH._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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