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청소년문학/웹소설)
처음부터 보기 1편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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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입이 땅에 박혀있고 다리가 거꾸로 서 있어. 그러니까 무슨 말을 하는지 들으려면 뿌리 쪽에 귀를 대봐’ 나는 삼촌의 말에 몸을 웅크렸다. 땅에 귀를대자 뺨이 간지러웠다.‘소리가 들려요.’ 시계 소리 같기도 하고 긁는 소리 같기도 했다. 삼촌은 내 뺨에 묻은 흙을 털며 웃어 보였다. 그런 날이 있었다. 그런 날도 있었다.
눈에 뒤덮인 향나무는 커다란 아이스크림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뿌리 부근에 귀를 기울였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릎이 시렸다. 미간에 눈물이 고여 떨어진다. ‘삼촌, 뭐라도 좋으니까 아무 말이나 해줘 봐요 좀.’ 그 순간 부스럭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소리에 집중했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통증이 작렬했다. 눈에 꺾인 나뭇가지가 등을 친 모양이었다. 목덜미 안으로 눈이 끼쳐 들어왔다. 오랜만에 본 조카를 발로 찬 격이었다. 나는 그대로 웅크려 앉았다. 서 있을 기운도 없었다. 창피하고 무기력해서 그대로 땅속에 들어가고 싶었다. 이제 더 기댈 곳은 없다.
“괜찮니?”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웅크린 자세 그대로 뒤를 돌아봤다. 키가 크고 마른여자, 녹차를 건넸던 여자다. 부끄러움에 몸을 일으키고 코트에 묻은 눈을 털어냈다.
“거기서 뭐 하고 있었어?”
“절하고 있었는데요.”
나는 그녀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피나, 목에”
여자는 뒷목을 쓸어 보였다. 머리카락이 걷히면서 하얀 그녀의 목이 드러났다. 내가 따라서 뒷목을 쓸자 빨갛게 피가 묻어났다. 나는 여자가 건넨 하얀 손수건을 받아 상처가 난 부분을 눌렀다. 통증이 몰려왔다. 미간을 좁히고 고개를 숙였다. 여자는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하곤 주차장 쪽을 향했다. 나는 허리를 틀어 향나무를 바라보았다.
“목 좀 보여줄래?”
여자는 데일 밴드를 가져왔다. 목덜미에 닿는 손이 차다. 커다란 눈에 광대가 드러나 초췌해 보였다. 이십대 후반? 나는 그녀를 ‘초체’라고 부르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초체는 삼촌의 향나무를 바라보았다. 눈이 맑았다. 폴라니트에 패딩까지 걸쳤는데도 마른 티가 났다.
“서울 살아? 갈 거면 터미널까지 태워다주고.”
강요는 아니라는 듯 손바닥을 내 쪽으로 펼쳐 보였다. 잠시 망설이다가 통장에 남은 금액을 떠올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평택을 뜨고 싶었다. 방에 대짜로 누워 천장을 바라볼 생각이다. 초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초체는 잠실에 산다고 했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차 안은 따뜻했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초체가 삼촌의 애인, 그 이상의 존재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삼촌의 지원금으론 집세를 내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그마저도 오래 일할 자신이 없었기에 직업소개소를 통해 일당을 뛰었다. 봉고차를 타고 외곽 갈빗집에 홀 서빙을 하기 도 하고 편의점 일을 대리로 뛰기도 했다.(인수인계가 맞지 않아 번 돈을 다 토해내야 했지만) 소개소에는 수능을 끝내고 아르바이트를 구하지 못한 아이들이 많이 찾아왔다. 일주일쯤 지나자 ‘일 못 하는 언니’라고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이 느려서 설거지도 못 했다.
이 주쯤 지나자 통장에 웬만큼 돈이 쌓였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카페에 들렀다. 확실히 달랐다. 친구들은 화장부터 옷차림까지 태가 났다면, 나는 어느 고등학교에서 걸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아니, 요즘 고등학생도 이렇지는 않다. 친구들이 남자친구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나는 초체를 생각했다.
양손이 무거웠다. 통장은 또 껍데기만 남고 말았다. 감색 코트에 아이보리색 기모 블라우스, 까만 스커트, 굽 높은 부츠까지 일주일분 일당이 날아갔다. 세일을 한들 겨울옷은 비싸고 또 비쌌다. 2주 넘게 계류 중인 초체의 손수건을 꺼내 만지작거리다가 마침내 휴대폰을 들었다. 강남역, 초체는 4번 출구 할리스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지하부터 2층 실내 테라스까지 개방된 구조 였지만, 사람들로 꽉 차있어 답답하고 또 답답했다. 2층에 앉아있는 초체의 모습이 보였다. 긴 머리에 좁고 가는 어깨,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층계를 밟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맞은편 의자를 빼자 초체는 책을 덮고 나를 바라보았다. 뿔테안경, 전혀 다른 인상이다. 앞을 보고 앉아 있었다면 초체를 알아보지 못했을 테다.
“뭐 마실래?”
초체의 낮고 나른한 목소리에 마음이 가라앉았다. 내가 산다는 말에 초체는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그날 그 꽃 언니가 둔거예요?”
초체를 처음만난 날, 삼촌의 향나무 아래는 하얀 작약 꽃이 놓여있었다. 초체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초체는 삼촌을 대학원에서 만났다고 했다. 내가 12살 무렵, 삼촌은 중국 유학을 간 적이 있었다. 삼촌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더 했지만, 초체의 불편한 표정에 말을 삼켰다. 새로 알게 된 사실은 삼촌이 칭화대에서 미대 석사과정을 밟았다는 것이다. 삼촌이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한 번도 본적이 없다.
“넌 요즘 어떻게 지내니?”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초체에게 털어놓았다. 초체는 다시 손수건을 건넸다.
“네 글, 내가 좀 볼 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고편 : part.5 이제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다
도이는 초체의 카페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노곤함에 눈이 감기고 도이는 삼촌의 꿈을 꾸는데, 그 내용이 평범치 않다. 초체는 삼촌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다음화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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