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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큐레 Feb 18. 2022

다람쥐의 망각이 상수리나무숲을 이루듯이


  "연쇄 도전마"라는 타이틀에 어울리게 시집을 발간한지 만 한 달이 된 지금 다음 책에 대한 구상도 시작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책을 내고 자신감이 붙긴 했지만, 여전히 새로운 주제로 새로운 책을 낸다는 게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아요.


  다음 책은 최근 몇 년간 유행하고 있는 심리검사 MBTI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책을 쓰기 시작하면 목차부터 구성해야 하는데, 써야지 써야지 생각만 하고 한두 달이 훌쩍 지났어요.


  물론 그 사이 회사에 다니고 시집을 출간하고 계절학기를 듣고 MBTI 교육을 받긴 했습니다만, 평생직장, 완전고용이 사라진 지금 회사에 다니는 것에 대한 커다란 애착도 없고, 나머지 일들은 어떤 결과를 만들기 위한 투자, 매몰비용에 가깝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책을 내야 한다'라는, 아웃풋을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다 문득 작년에 한 출판사로부터 MBTI 도서를 출판해 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어요. 주고받은 메일을 찾아보니 몇 가지는 다운로드 기간이 만료되었지만, 만들어둔 목차와 아이디어들이 남아있더군요. 계절 지난 옷을 꺼내 입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지폐가 만져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출판사 제안을 받고 진짜 열심히 짜둔 흔적들이 보였어요. 출판 계약이 물 건너가고 바쁜 일상을 살아가다 보니 망각했던 것이 이렇게 남아있다는 게 참 신기했습니다. 글쓰기의 묘미라고 생각해요. 그대로 쓸 수는 없겠지만 조금만 노력과 시간을 투자하면 쓸 수 있을 정도로 양생이 가능해 보입니다.


  사실 이번 시집도 "아 나는 시를 많이 써서 나중에 시집을 내야지" 하고 쓴 게 아니었어요. 그때그때 무의식적으로 쓴 글이 남고 쌓여서 우연히 엮게 된 시집입니다. 십 대 후반부터 이십 대 후반까지 쓴 시들을 참 열심히 긁어모았어요. 어떤 시는 하드디스크에, 어떤 시는 스마트폰 메모장에, 어떤 시는 블로그에 비공개 글로 남아있더군요.


  그렇게 퍼져있던 글들을 하나로 엮고 보니, 마치 다람쥐가 여기저기 도토리를 숨겨놓고 잊어버린 것들이 우연히 하나의 숲을 이룬 것처럼 보였습니다. 헤르만 헤세는 작가의 글을 '정원'에 비유했지만, 저는 정원사와 같은 의도와 설계를 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저 삶의 방식 가운데 우연히 출현한 숲에 가까워 보입니다.


  글쓰기 모임에 뿌려둔 아이디어도 바쁜 삶 가운데 잊혀 있다가 언젠가 때가 되면 뚜렷한 형태를 가진 나무가, 숲이 되지 않을까요? 다람쥐의 망각이 상수리나무숲을 이루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되길 감히 염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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