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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햇살 코치 Dec 22. 2021

괜찮아, 강박이야!!! 1탄

전교 1등 우등생, 권고사직을 당하다

<인생 2새로운 시작>     


햇살이 화사하게 빛나던 5월 어느 날, 퇴직 후 2년 만에 옛 직장의 동료 둘과 점심을 먹었습니다.

나를 보자마자 둘은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소 큰 목소리로 놀란 듯 말합니다.

“차장님 얼굴이 많이 밝아지셨어요.”

“진짜, 다른 사람 같으셔요.”

그 말에 신이 나서 상기된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어, 그래? 드디어 내 인생에 봄날이 왔잖아. 호호호.”

“우리 차장님 참 긍정적이시다. 이제야 봄날이 왔는데 저렇게 신나시다니…….”

OO과장이 빙그레 웃으며 하는 말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응수합니다. 

“이제 100세 시대잖아. 아직 50년은 더 남았는데 지금이라도 인생 폈으니 얼마나 좋아?”

우리는 마주 보며 깔깔깔 웃었습니다.      


마음이 괴롭고 힘들 때, 내게 마음을 내어준 동료들 덕분에 그 마음에 기대어 그나마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들과 웃으며 옛이야기를 나누며 맛나게 밥을 먹을 수 있어 정말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내가 이렇게 마음이 편하고 행복해도 되나?’ 

가끔 이런 생각이 스치기도 합니다.


돌이켜 보면 오랫동안 희미하나 마음속에 ‘하고 싶은 것’을 품고 있었습니다. 퇴직 후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만났고, 그것을 배우고 전하며 인생 2막을 즐기며 살고 있습니다.     

 

지금도 직장이나 가정에서 삶의 무게를 오롯이 받아들이고 견디며 매일매일 성실히 살아가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그분들에게 특히, 저와 같은 엄마들에게 작은 희망과 용기가 되기를 바라며 부끄러운 이야기를 꺼내놓습니다.




<두 번째 승진 누락도대체 나에게 왜 이런 일이……>     


© elisa_ventur, 출처 Unsplash



조용한 사무실,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마우스 휠을 위아래로 몇 번을 돌려 보지만 검은색으로 나열된 승진자 명단에서 내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순간 눈앞은 캄캄하고 머릿속이 하얗고 가슴은 커다란 구멍이 생긴 듯 휑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남아있는 힘을 끌어모아 다리에 힘을 주고 뚜벅뚜벅 걸어서 대각선에 있는 팀장님에게 간다.

“미리 말씀해 주시기로 했잖아요.” 

“나도 지금 알았어.”

팀장님과 공허한 대화를 나누고 자리로 돌아온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다. 첫 번째에는 회식에 참석해 승진자들을 축하해주는 호기를 부렸지만, 이번에는 결과를 받아들이기도 힘들고 누군가 뜨거운 물을 확 끼얹은 듯 얼굴이 화끈거리며 쿵쾅거리는 심장박동과 함께 창피함이 온몸으로 몰려든다.

‘이럴 때는 도대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걸까?’     

승진 발표가 났지만, 그 넓은 사무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하다. 아마 다른 사람들은 메신저로 축하 인사를 바쁘게 주고받고 있을 것이다. 

‘아……’ 

적막함과 싸한 기운에 뒤통수는 화끈거리고 숨이 막힐 것 같다. 표를 내면 더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아 엑셀 프로그램을 실행해 놓고 빈칸만 바라보며 꾸역꾸역 앉아 있다. 

‘다른 본부는 미리 알려줘서 승진 발표날 휴가를 쓰게 한다는데……. 나는 그런 배려조차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구나.’ 

머릿속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내 모습이 작고 초라하게 보여 고개를 떨군다. 퇴근 시간,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향한다. 목이 점점 메어온다. 차에 오르자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시동을 걸고 운전을 하며 가는데 아버지의 모습과 함께 어린 시절 한 장면이 떠오른다. 

“전부 수수밭이네. 상장으로 도배를 하고도 남겠다” 

성적표를 가져가면 아버지께서 환하게 웃으며 늘 하시던 말씀이 들려온다. 

중고등학교 시절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고 국내 최고 대학 석사 출신인 내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 422737, 출처 Pixabay



학창 시절 수학을 좋아했다. 원리에 따라 문제를 풀고 답이 나올 때 느껴지는 상쾌함은 마치 퍼즐 조각이 ‘딱’ 소리와 함께 맞춰질 때 손끝에서 느껴지는 짜릿한 쾌감 같다.      

중학교 때 시에서 주최한 수학경시대회 날이었다. 각 학교 대표들이 한 교실에 모였고 종소리와 함께 긴장된 마음으로 문제를 풀었다. 경시대회 문제였는데 의외로 풀만 했고. 검산하며 뒷장 첫 번째 문제의 답을 고쳤다. 그 순간 감독 선생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놀라서 고개를 들고 얼굴을 보니 인자한 미소를 띠고 나를 보고 계셨다. 순간 알았다. ‘내가 백 점을 맞았구나.’ 정말 짜릿하고 벅찬 순간이었다.     

    


아버지는 항상 ‘잘해야 한다’, ‘완벽해야 한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모범생이었던 나는 주입식 교육제도에 딱 맞게 길들었고 문제가 요구하는 ‘정답 찾기’에 매우 능했다. 전교 1등 성적표를 가지고 가서 아버지에게 칭찬을 받으면 신났고 조회시간에 교단 위에 올라가 상을 받으면 쑥스럽기도 하지만 뿌듯했다. 나는 항상 1등을 해야만 했고, 1등이었다. 

그런데 학창 시절 성공 경험이 사회생활을 할 때 발목을 잡을 줄이야…….


직장생활도 학창 시절 공부처럼 정답이 있는 줄 알았다. 어딘가에 이미 있는 답을 나만 모르고 있다는 사실(당시 그것을 사실이라고 인식했다)에 마치 공부를 안 하고 시험을 앞둔 학생처럼 막막하고 마음이 불안했다. ‘만점’이라는 이상과 ‘막막한’ 현실 사이의 엄청난 차이에 한 발 떼지도 못하고 좌절했고 이 경험이 반복될수록 무기력이 심해졌다.




<우울증이러다 정말 큰 일 나겠구나>     


이듬해 팀장님과 합심해서 기를 쓰고 성과를 냈고 임신 사실을 숨기고 해외출장까지 가면서 가까스로 승진을 했다.


한고비를 넘겼지만 연차가 올라갈수록 새로운 역할이 요구되었고 나에겐 그 모든 것이 두려운 도전이었다. 나는 제자리에 있었고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갔다. 이런 나 자신이 맘에 들지 않았고 불안감과 조급함이 뒤 쳐진 나를 압박하더니 우울증이 찾아왔다. 머리 위에는 시커먼 먹구름이 있었고, 어깨는 세상 짐을 다 진 듯 무겁고, 얼굴은 잿빛으로 굳어있었다.   

  

“엄마, 무슨 일 있어?”

“어? 아니야.”


8살 딸의 물음에 정신을 차린다. 퇴근 후 식탁에 앉아 있지만, 머릿속은 회사에서 있었던 일로 가득하다. 표정 없이 생각에 빠져 나도 모르게 멍하게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 몸은 아이와 함께 있으나 마음은 아직 퇴근하지 않았다. 예민하고 사려 깊은 딸은 엄마의 표정을 살피며 질문을 던져 생각의 늪에서 나를 꺼내곤 한다. 그리고 나는 또 어느새 나만의 생각 속에 빠져있다. 


‘이 정도 일도 못 하다니 나는 정말 무능해.’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할까.’


부정적 생각의 악순환이 반복된다.     


© anthonytran, 출처 Unsplash



어느 날, 새벽에 일어나 베란다에 웅크리고 앉아 물끄러미 밖을 보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아래를 보니 저 멀리 딱딱하고 차가운 회색 시멘트 바닥이 보였다. 

‘여기서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머리를 빼꼼히 내밀다가 순간 ‘이러다 정말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화들짝 놀라 정신 차렸다.     

어느 병원을 어떻게 갈지 몰라 큰 오빠와 상의하고, 망설이다 대학병원을 찾았다. 나 같은 성향의 사람이 병원을 찾을 때는 이미 심각한 정도라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기분이 묘했다. 슬프기도 하고 진단을 받으니 오히려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난 아픈 사람이니까 치료가 필요하고 쉬어도 돼’ 


나는 자신에게 휴식을 허락하는데도 의사의 진단이 필요한 그런 사람이었다.   

   

아이들이 어려 이참에 육아휴직을 쓰기로 결심하고, 팀장님께 말했다.

“저 휴직하려고 합니다.” 

회의실에서 말을 하는데 밤새 한숨도 못 잔 심장은 마구마구 방망이질을 쳤다. 나에게 그건 태어나서 처음으로 세상에 던지는 ‘도발’이었다.

     

우울증 약을 먹으니 내 몸의 모든 기능이 0.5배속으로 느려진 듯했다. 나를 내 의지대로 하지 못하니 답답하고 내가 아닌 것 같았다.  내 힘으로 관리해야겠다고 결심하고 한 달 동안 먹었던 약을 끊었다. 휴식을 취하며 명상을 계속하니 가슴에 얹어있던 돌덩이가 하나씩 사라져 가벼워졌고 차츰 일상에 적응했다.




<권고사직결국 올 것이 오다>     


복직 후 회사에서의 상황은 점점 더 안 좋아졌다. 마음 근력은 강해졌지만, 사람들과 의사소통하고 협업을 통

해 성과를 만들어가는 방식은 여전히 미숙했다. 


‘이게 바닥이겠지. 이 이상 어떻게 더 나쁘겠어?’라고 생각하며 달랬지만 다음 해에는 더 아래로 내려갔다. 

‘학교 우등생이 사회 열등생이 될 수 있다더니 내가 그렇구나’ 


좌절감에 속 빈 강정처럼 빈약했던 자존감은 맥없이 바스러졌다.      


© mohamed_hassan, 출처 Pixabay



오늘은 사표를 써야겠다고 출근할 때마다 다짐을 하며 지내던 어느 날 사내 메신저로 인사팀장에게 메시지가 왔다.

“차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회사 주변 커피숍에서 만나자는 말에 무슨 이야기를 할지 직감했다. 긴장된 마음으로 약속 장소에 가니 사람들 시선이 잘 닿지 않는 안쪽 구석에 사진에서 본 인사팀장의 모습이 보인다.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차를 주문하고 마주 앉아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 상태로는 앞으로 회사에서 원하는 수준의 성과를 차장님에게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순간 내 얼굴이 구겨진 종이처럼 일그러지며 마음속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린다. 결국, 올 것이 왔다. 사오정이라는 말이 진짜 현실이 되었다. 오래전부터 회사에서 잘릴지 모른다는 걱정을 사서 해서 그런지 오히려 담담했고 이 고단한 생활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차라리 홀가분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실패자’라는 생각에 마음이 씁쓸했다. 커피숍을 나와 한강 변을 걷는데 햇살은 화창하나 가슴을 파고드는 바람은 시리게 느껴졌다. 

‘돈 때문에 나를 갉아먹으며 껍데기처럼 살아가는 이 생활을 이제 그만하자, 하루를 살아도 나의 모습을 찾고 사는 것처럼 살자.’


마침내, 10년간 고민만 하고 망설였던 퇴직을 결심했다.      

마지막 출근날 팀장님에게 메시지가 온다.


“차장님~ 회의실에서 모여 인사 나누시겠어요?” 

“아니요.” 


퇴직을 결심하고 하루 만에 퇴사를 해서 몇 명에게만 알린 상태다. 회의실에 모여있는 사람들 앞에서 할 이야기도 없고 서로 얼굴 보기도 민망할 듯해서 조용히 마지막 출근을 마무리했다. 퇴근 후에 실장님과 팀장님, 과장들과 조촐한 술자리를 가졌다.


“힘드셨죠. 고생하셨어요.” 


그 말 한마디에 명치에서 뜨거운 것이 확 올라왔고 결국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소리도 없이 고개를 돌려 천장을 보았고, 동료들은 그저 함께 말없이 있어 주었다.

20년간의 직장생활은 그렇게 끝났다. 그렇게 혹독하게 자신을 비난하고 다그치며 힘겹게 생활했는데 그 끝은 너무나 가벼워 허무했다. 

‘그래, 나도 이만하면 할 만큼 했지. 이제 하고 싶은 일 하며 살아도 돼.’ 

자신에게 말하며 집에 돌아오니 남편과 아이들이 반겨준다. 

“그동안 애썼어.” 

내 어깨를 토닥이며 안아주는 남편이 참 고맙고 든든하다.  


-2탄에서 계속- 


*<나의 삶 그리고 자존감> 오디오클립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8079/clips/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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