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섯 살까지 외동딸이었다.
첫째들은 보통 동생이 태어나면 엄마를 빼앗긴다는 생각에 질투한다는데 나는 뺏긴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부모님에게 동생이 생긴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리 좋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동생이 태어난 후로는 동생이 우유 먹는 거, 트림하는 거, 기저귀 가는 거 모든 걸 신기해하며 내가 한 번만 해보겠다고 엄마를 졸랐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못 미더운 나에게 맡겨질 리 없었고 늘 목말라 있던 나는 일 년 뒤 막냇동생이 태어났을 때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갓난아기가 하나 더 태어나자 버거웠던 엄마는 자연스레 한 명을 나에게 맡기기 시작했다. 공식적으로 나의 인형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엄마에게 들었던 썰로는 나 하나만 낳고 더 이상의 자녀계획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셋째까지 있냐고? 내 말이.
엄마가 20대 초반 경상남도 합천에서 인천으로 올라와 재봉 공장에서 일하면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을 때 공장의 재료를 공급해주는 직원이었던 아버지와 만나 연애를 했다. 만난 지 얼마 안 돼서 덜컥 혼전 임신을 하는 바람에 아이를 지우고 혼인신고를 했다. 없는 형편에 결혼식은 꿈도 못 꾸고 혼인신고만 한 채로 같이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혼인신고를 하고 아이를 가지려 노력하자 계속 유산되었다. 마치 겁 없이 아이를 지운 엄마, 아버지를 혼내기라도 하듯이, 두 번의 유산 후 엄마는 합천 할머니 댁에 잠시 내려갔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많이 힘들어하는 엄마에게 할머니는 한약을 한 제 지어주셨다. 정말 한약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엄마의 마음고생에 이제 그만하면 되었다는 뜻이었는지 그 후 나를 임신했고, 혹여나 잘못될까 불안했던 엄마는 일도 그만두고 집에서 태교에 전념했다.
그런데 엄마가 일하지 않으면 아버지가 엄마에게 생활비를 주어야 하는데 임신 초기인 엄마가 집에 있는 4개월 동안 아버지는 생활비를 한 푼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3~4개월을 생활비 없이 지내다 엄마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안정기가 되자마자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때 엄마는 결심했다고 한다. 이렇게 생활력이 없는 남자면 아이는 한 명 이상은 절대 못 낳겠다고. 그렇게 결심을 하면 뭣하나 엄마의 사상과 우리나라의 사상은 차이가 명확한 시대였다.
"아들은 하나 있어야지, 계집애 하나 낳고 뭐 하는 거냐"
"둘째는 언제 낳을 거니?"
"왜 애를 더 안 낳는 거냐?"
이렇게 가족계획을 다른 사람이 왈가불가하는 천박한 시대였다. 그래서 딱 하나만 더 낳자고 해서 가진 게 나랑 여섯 살 차이 나는 둘째 동생이었다. 처음 산부인과에서 아들인 거 같다고 넌지시 말해주었을 때 엄마는 너무 기뻤다. 하지만 혹시나 아닐까 봐 무서운 마음에 아무에게도 아들이라고 말 못 하고 다녔다고 한다. 남편인 아버지한테조차도 말이다.
그렇게 둘째가 태어나고 왈가불가 좋아하던 사람들이 아들이 태어나자 엄마의 대접은 한순간에 달라졌다. 양쪽 집안을 통틀어 처음 태어난 아들이었다. 어려운 살림에 산부인과 1인실에 입원해주는 것은 물론 내가 태어났을 때 오지도 않았던 양가 어른들이 모두 달려와 축하해 주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화났지만 글을 쓰는 지금도 타자기에 힘이 들어간다.
부모님은 자식이 둘이나 생기자 아이를 봐줄 사람이 필요해서 인천 생활을 청산하고 강원도 시댁으로 내려왔다. 이때부터 엄마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집살이가 시작되었다. 방 3칸에 화장실 1개인 집에서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나 동생 삼촌 강아지 소 닭 강아지까지 같이 살았다.
엄마는 아이 둘을 돌보면서 집안일 농사일 가리지 않고 하느라 온종일 바빴다.
그런데 엄마는 둘째 동생을 낳고 7개월이 지나갈 무렵 몸이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병원을 방문했는데 산부인과를 가라는 소견을 받았다. 응? 거길 왜요?라는 생각으로 산부인과에 갔던 엄마는 두 귀를 의심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형을 똑 닮은 동생이네요. 이제 6개월인데 설마........ 아직 모르셨어요??"
이 부분은 내가 생각해도 정말 어이가 없다.
엄마는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몸에 벌써 6개월이나 된 아이가 또 있다니 말이다. 사람 마음먹은 대로 되는 건 정말 하나도 없다! 신이 나에게 장난을 치나. 원망도 들었을 텐데. 아이 셋의 엄마는 그럴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이렇게 버라이어티 한 가족계획으로 우리는 삼 남매가 되었다. 늘 혼자여서 심심했던 나는 두 남동생의 누나가 되면서 철없이 재밌었다. 내 의견이라고는 한 개도 들어가지 않는 가족계획이지만 동생들이 없었다면 이라고 가정한다면 당연히 '절대 안 돼!!!'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든다.
천박한 시대가. 엄마의 운명이 나에게는 행운이었다. 그 힘든 시절을 동생들 없이 버틸 수 있었을까. 더 삐뚤어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만으로도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